2005년 2월 14일에 씀. 즉, 발렌타인데이 때 혼자 이러고 있었단 거지.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 했을 때,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우리가 하는 행동의 상당부분 신이
책임져야 한다. 불행까지도.
늘상 사용하는 컴퓨터는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컴퓨터가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용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보다 빠른 정보처리와 방대한 용량, 그리고 무한한 호환가치에 있을까.
어떤 면에서 컴퓨터가 도구 이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반항심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간단한 연산 지시를 하고 결과를 예측하는 사용자를 얼떨떨하게 만드는 터무니 없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야말로 컴퓨터를 컴퓨터 이상의 가치로
만들어준다. 비록 도구로서의 가치만을 바라마지 않는 다수 사용자에게는 '고물' 이상이 아니겠지만.
신이 컴퓨터를 만들 듯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의 모든 인식은 프로그램된 연산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증거로서 인간이 만든 동물우화의 모든 동물은 다분히
인간적으로 해서되며 인간적으로 사고를 한다. 풀잎을 툭툭 치며서 인간은 풀잎의 고통을 "아야! 아야!"하는 식의 동물적 감각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풀잎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나 동물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로 느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인간은 당연히 공포나 통증 같은 인간위주의 용어로 밖에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즉, 이해할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해서 어처구니가 없지만, 인간은 인간의 인식범위 내에서만 사고활동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에 대해 체감하지 못하며, 그 보다 작으나 존재하는 무엇이 있을 경우 감지할 수 없다. 가청 수치
이상의 음계 역시 체감하지 못하지만 그 음계와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고 불가능한 영역을 사고하지 못함과도 같다. 컴퓨터로
실행할 수있는 모든 작업이 인간의 의도나 설치와 관련되어 있다면, 인간의 모든 사고활동 역시 신의 의도나 설치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자유의지'라 부르는 것 조차도 '인간 본성'의 측면에서, '우연'조차도 '우연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이미 설치되어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생겨난 지 몇 만 년, 불을 피우던 최초의 순간부터 신이라는 것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떠올린 것을 보면, 인간은 다분히 조종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말도 못하는 인류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의 존재를 떠올린다는 것은,
떠올리도록 프로그램화 되었다고 밖에는 설명 할 수가 없다. 때문에 보다 인간적이며 보다 진보적인 인류의 미래를 떠올릴 때마다 초고성능 진보된
도구, 컴퓨터가 떠오르고는 한다.
일정 시기 이후부터는 컴퓨터가 컴퓨터를 발전시키듯이 인류가 인류를 발전시켜
왔다.
내가 하는 가장 아름다운 상상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아이를 낳거나 만들거나 생산해내지
않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 이후로 단 한 명의 아이도 태어나지 않는다고 가정할 경우 100년 이내에 인류는 사라질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규정짓는 최대 특성을 벗어나는, 컴퓨터가 스스로 컴퓨터가 아니게 되는 초감동의 성취일 것이다.
종로에 나갔을 때, 수 십 만개의 간판과 건물들은 그대로 있지만, 겨우 몇 몇 가게에나 겨우
사람이 보이고, 거리는 텅텅 비었고, 곳곳에 주인 없는 자동차가 멈춰서있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압구정이든 청량리든 어느 거리나 움직이는 차보다
주인 없는 차들이 더 많고 수 십 개의 가게 중에 겨우 몇 곳에서만 도심 속의 산짐승 마냥 사람 몇몇이 발견되는 것이다.
더이상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때 인류는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난다. 식량과 노동,
전쟁과 차별 문제가 사라진다.
컴퓨터에게는 사실 각종 컴퓨터 작업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인간에게 그 작업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작업을 위해 컴퓨터는 만들어졌으며 그렇게 활동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끝없이 자식을 만들어내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능이며 감각에 따른 행동일 뿐이지 이유는 아니다. 마치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본능의 명령만 존재하며,
실행의 이유는 없는 것이다. 자식을 낳아서 인류를 기필코 연명시켜야 하는 이유, 그것은 장착된 소프트웨어 본능일 뿐이며, 아마도 그 진짜 이유는
인간의 사용자, 곧 신에게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각계의 종교적 지도자와 도덕적 지도자들, 윤리 옹호자들, 가정주의자들,
수국주의자들은 일종의 백신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좋은 가정과 아이의 생산, 결혼, 성실, 직업, 화목, 믿음, 공통체, 사랑이라는 가치관들을
이용해서 감염 우려가 있는 가치관들을 물리치는 바이러스 치료가 이뤄진다. 이 모든 인류의 활성 유지 옹호자들은 결국 영원히 계속되며 보다
합리적으로 활동하는 굳건한 인류의 형태를 소망한다.
그 형태가 이뤄질 경우, 인간들은 보람, 만족, 희망을 느낀다. 곧 행복감을 얻을 수있다.
그러나 행복감만을 위해 좋은 인류를 유지하는 것은 수준낮은 인류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인류의 유지에 따른 진정한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그 이유가 본능적 만족에 있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본능적 만족이란 절대적이며, 주입된(타고난) 가치방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본인이 아이를 낳기 싫을 경우, 아이를 가져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사회라는 프로그램은
공공연히 이것저것, 아이를 가져야할 이유를 제시하고는 한다. 결국 아이는 필요하며 가정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인류에서 좋은 것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대체 그 아이를 어디다 쓴단 말인가. 감각적 쾌락(정, 가족애, 인류애 등)을 제외할 경우에. 컴퓨터가 활동하는 것의 이유가
컴퓨터본인에게는 없는 것처럼, 컴퓨터 또한 본능(명령체계)만이 존재함으로서, 그 활동의 이유가 인간에게 있는 것처럼, 인간의 활동 이유 또한
신에게 있음이 거의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인류가 충분히 납득함으로서 인류의 생산을 멈추기로 스스로 결정했을 때, 당황할 것은 죽어가는
인류도,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류도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어가고 있는 인류 바깥의 신 정도일 것이다.
인류란 결국 사과나무와 같다. 사과나무의 모든 활동은 본능으로 인해 이루어진다. 씨앗부터 성장 또 다른
열매를 맺기 까지의 모든 활동의 이유가 본능이다. 인간은 사과나무의 본능을 이용해서 과일을 얻는다. 본능을 제외할 경우 사과나무에게 사과를
맺어야 할 이유는 없듯이, 본능을 제외할 경우 인간에게 인간을 낳아야 할 이유는 없다. 결국 사과열매를 따먹듯이 인간의 생산과 에너지, 활동을
집어삼키는 신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당신이 아이를 갖고 싶다면 여기에 '아이를 갖고 싶은 본능', '아이로 인해 짐작되는 각종
기쁨들(기쁨추구의 본능)'을 제외하고 아이를 가져야하는 명백한 이유가 있는가.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모든 본능들을 당신이 만들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본능의 지배를 받아 노예 컴퓨터처럼 본능의 명령대로 아이를 생산하고 있으며 그 아이는
노예의 후예로서 또 지배받는 삶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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