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틈틈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읽었다.
이에 감동 받아
친구를 삶에 있어서의 데코레이션처럼 만나는 것에 불만을 갖는다는 내 생각에 대해
나름 정리를 해 보았다.
<우선 내가 싫은 것이 도대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볍게 이 친구 저 친구를 만나고, 이 친구 저 친구를 사귀고
그러다 보니 이 친구 역할을 저 친구가 할 수도 있고
저 친구 역할을 이 친구가 할 수도 있고
이 친구를 걷어내고 다른 친구와 붙어다녀도 그리 내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다는 것, 그런 정도의 사소하고 일상적인
관계로서 친구가 관찰되어지다는 것이 불만이다.
<그것이 왜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인가에 대해서>
내 인생을 하나의 케잌으로 보았을 때
목격되어지는, 그리고 지금의 내가 두르고 있는 친구들은 결국 그 케잌의
데코레이션이라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내 삶을 꾸미고, 내 과거를 얘기할 줄 알고, 나를 기억해 주고,
때때로 기분전화과 유머와 공통된 관심사를 얘기하고,
또봐~ 하면서 돌아섰다가
만날 기회가 생길 경우, 상대적으로 이녀석은 다음에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까...
라는 핑계로 그 만남의 기회가 항시 뒷전으로 밀려나고는 하는 그런 관계.
내가 케잌이되 어떤 케잌으로 보일지를 결정해주는 존재.
내 주변에 친구들이 대략 생과일들이면 나는 생과일 케잌으로 보일 것이다.
내 주변에 친구들이 대략 생크림으로 보이면 나는 생크림 케잌으로 보일 것이다.
내 주변에 친구들이 대략 초코렛으로 보이면 나는 초코케잌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당연해 보이고 또한
케잌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므로 그다지 나쁠 것 없으며
다들 그런 식으로 케잌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데 나 또한 그런들 어떠하며
심지어는 그런 식으로 가볍게 순간 순간을 즐기는 것이 이 시대의 삶의 감상
이라는 일반론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만드는 그런 관계이다.
그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내 주변의 생크림을 모두 걷어내고 초코버터를 쳐바를 경우
내가 초코버터케잌이 되어버린 다는 것! 때문이다.
내가 대략 생과일들을 내 위에 얹고 있어서 생과일 케잌으로 보이지만
이 과일들 대신 호두가 올려져 있다면 호두케잌이 되어버린다는 것! 때문이다.
<문제의 요점을 정리하자면>
대략, 친구와의 관계가 자신의 본질까지 침투해오지 않는 정도로 겉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코코아라는 친구와 사귀었는데 어느 순간 코코아와 소식을 잘하지 않게되고
녹차가루라는 친구와 사귀게 되면, 나는 녹차케잌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겉보기에는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내가 케잌이되 어떤 케잌이라는 것을 그만큼 코코아라는 친구가 증명해주지 못했다는 셈이다.
내가 여러 친구들로 하여금 내 인생의 데코레이션을 시키면 시킬 수록
여자가 수 십 종의 화장을 수 십 년을 하더라도 본래의 얼굴 자체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친구는 장식, 친구는 꾸밈, 친구는 기교, 친구는 수단, 친구는 목격자
정도로 본래의 성격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의 정리 - 치즈케잌>
내가 원하는 것을
오늘 오후 커피를 마시다가 발견했다.
치즈케잌.
치즈케잌에 데코레이션이라고는 없다.
친구라고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치즈케엨에는 치즈가 녹아있다.
카스테라빵의 수분을 줄이고 반죽양의 상당부분을 치즈와 함께 한다.
진정한 데코레이션이란 결국
거기서 그걸 빼면 엉터리가 되어버리는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 대략 내가 원하는 친구와 나와의 관계를 알겠다.
그것은 계란, 그것은 치즈, 그것은 물, 이런 것이다.
나를 이루는 것, 오븐 속 화씨 220도 고온 속에 함께 있어주는 것.
내 안구 속 깊이 침투하여 뇌와 생각 인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설사 죽을 때까지 그 친구를 보지 못하더라도 내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것.
치즈케잌의 치즈.
데코레이션이란 것은 걷어내거나 변형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치즈케잌에서 치즈를 걷어낼 방법이란 없다.
그것은 마치 업질러진 물,과 같다.
나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존재로 정의내리게 하는 존재.
<그러므로, 그렇더라도>
나는 치즈케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라고 한다면
나의 친구에 대한 정리는 전혀 감안할 필요가 없다.
결국 인생이란 '취향의 고착화' 정도로 여길 수 있는 것이니까.
내가 느끼는 취향이, 케잌 중에서는 치즈 케잌이라는 것
혹은 무스케잌처럼 주와 객의 변별이 어려운 그런 위태롭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
그것을 정리하고 싶어을 뿐이다.
내 정리에 맞춰서
친구를 찾다보면
가장 찾기 쉬운 근사한 친구는
부인, 남편, 아내, 마누라, 바깥사람, 안사람, 허즈밴드, 돈벌어오는벌레, 살림하는벌레, 일 것이다.
왜 가족이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야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대략 친구라는 존재가 현란한 장식, 식감을 불러일으키는 꼬임의 도구, 이상의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훨씬, 더 심한, 미식가이니까
가족 바깥에서
그야말로 아내나 남편, 자식과 같은 다른 이름으로는 대체될 수 없는
오로지 <친구>라는 말로 밖에는 수식할 수 없는 그런 친구를 찾고 싶다는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
내게 주어진 인생은 대략 130년 정도일 것이고
그 중에 28년을 벌써 써버린 상태고
남은 시간 동안 친구를 찾는 노력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이 노력은
<챨리와 초콜렛공장>에서 초코렛 속에 든 '초대권'을 찾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아주 운이 좋거나
매우 돈이 많거나
매우 부지런하거나
혹은
<주인공>이어야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ps. 빵집, 빵공장에서 하루 16시간씩 고되게 일해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케잌 중에서도 치즈케잌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치즈 케잌이나 무스케잌 등을 제외한 다른 케잌들 - 버터, 생크림, 과일, 초코, 등등 -
이 동일한 반죽에서 동일한 온도로 구워진 카스테라로 겉만 다르게 만들어지는 반면
치즈 케잌은 반죽도 특별히 다르게 되고
(뉴욕치즈케잌, 필라델피아치즈케잌, 라즈베리치즈케잌 등, 이들은
모두 저마다 다른 반죽이 사용된다)
오븐도 독자적으로 다른 오븐 속에서 다른 온도로 구워지며
무엇보다도 다른 케잌들보다도 빵을 굽는 데에 있어서
난이도가 요구되는
(처음 치즈케잌을 만들 때는 항상 케잌이 폭삭 주저앉아버린다고 한다.
다른 카스테라에 비해 반죽의 농도가 훨씬 진하고 물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케잌이었기 때문이다.
ps2. 나는 어려서부터 케잌을 좋아했지만 치즈케잌을 만나게 된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그 이전까지는 치즈케잌을 먹어보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먹어온 케잌이 항상 아쉬움을 남겼던 것은
카스테라와 버터를 먹는 듯한, 카스테라와 초코렛을 먹는 듯한, 카스테라와 크림을 먹는듯한
맛의 이분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악보로 치면, 화음이라고는 없는 두 멜로디의 나란히 늘어선 배열 정도로 뿐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맛이었고 케잌이 주는 이미지 상의 환상성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치즈케잌을 먹었을 때 느낀 감정은 환상에 가까웠다.
이토록 누리끼리하고 투박하게 생긴 것이 그토록 깊은 맛을 낼 줄은 전혀 몰랐다.
무엇보다도, 치즈케잌이 케잌의 맛을 대표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케잌>이라고 불리는 먹거리의 성격을 보다 완성도 있게 정의해줄 수는 있는 것이었다.
케잌? 빵에다가 크림 바르고 초코렛 몇 개 올려 놓은 거?
라는 조립식 개념에서
이건 대체 뭐야? 뭐라는 거야? 아- 케잌이구나-!
라고 하는 하나의 완성된 개념으로 감동을 준다.
그렇듯이 친구란,
나와 연락이 되는 누구,
나와 과거가 비슷한 누구,
나를 아는 누구,
나와 누구,
가 아닌
친구란,
아- 친구구나-!
마지막 ps.
요즘은 치즈케잌과 닮은 그런 종류의 케잌들이 많이 나와 있다.
고구마케잌, 녹차 케잌 등.
물론 대 환 영 이로소이다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