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더 멀리 가서
오정국
세입자는 나에게 통키치킨 병따개와 화장실 변기 뚫는 고무, 쓰레기봉투 두 장을 남기고 갔다 나는 아무런 대가없이 그것들을 이어받아, 따고, 뚫고, 내다 버린다
집주인은 도배를 함으로서 세입자의 흔적을 지웠지만, 그녀의 자질구레한 손때와 못 자국, 모기의 핏자국 같은 걸 지워버렸지만 우편함엔 무슨 신용금고 고지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와 앉았다 그것들의 제목을 살피는 게 하릴없는 일과의 마무리가 되었다 저당 잡힌 생의 슬픔처럼
번식기엔 개구리가 더 많이 울었다
나는 그녀가 정말 독신이었는지, 호프집을 경영했는지, 그 종업원이었는지 알 수 없다 집주인과 그녀가 부동산 계약 이상의, 그 어떤 거래를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곳에 와서 나는 가을나무의 단풍이 우듬지부터 물든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깝고도 먼 산의 어여쁜 족두리들, 아무래도 그녀는
부도를 내고 이 집을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이곳의 세입자이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멀리, 더 멀리 가서 살아주기를 바라고, 까닭 없이 그 생을 앓고 싶은 것이다 불현듯 가까워진 단풍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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