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 근처에서
김원국
자정이 넘은 시간이다
방문은 참깨처럼 닫혀 있다
난쟁이 병사들의 칼부림처럼
멀리서 쟁쟁거리는 소리 들려온다
저녁에 먹다 남은 국과 제삿밥을
챙겨 드시는 것이다
술 취해 자다 깬 아버지가
쟁그랑 쟁 쟁-
어머니 돌아 가신지 1년
문에서 방귀 소리가 뿡- 난다
냉장고에는 막걸리와 정종과 소주가 가득하다
어머니 가슴 같은, 묵직한 배도 세 박스 와 있다
가을 모기가 햅쌀처럼 날아다닌다
나는 어느 것 하나 잡을 수가 없다
모기를 다섯 마리나 때려 잡고
잠든 동생은 허벅지를 벅벅 긁는다
제 껍질을 제가 까고 있다
아버지 그릇 비우신다
방문 근처에서
가방을 훔치다
김원국
졸업 후 처음 찾은
학과 세미나실에서 가방을 훔쳤다
문짝처럼 입 벌리고 있었다
시집이라도 한 권 들어있었더라면
누군가의 집인 줄 알았을 텐데
오늘따라 학교엔 잠긴 문들이 많고
나무마다 주둥이 한 움큼씩이다
허기진 구름이 삐-걱 눈을 감는다
고작, 가방 하나 훔쳤을 뿐인 걸
회색과 파란 색이 섞인
배낭형 north face 가방
책이 안 들었으니 책가방은 아닐 테고
젊음도, 사랑도, 열정도, 텅 비어 있으니
그저 버려진 가방 아닌가
종이봉투에 들어있던
늘어난 수영복, 젖은 수건, 바지며 셔츠, 냄새 나는 속옷들을
훔친 가방에 옮겨 담는다
오랜만에 느끼는
빠른 지 느린 지 모를 감동
형광등 하나 하나에 마디가 진다
나는 이제 서울로 뜰 것이다
소위 잘 나가는 외국계 광고회사에서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로 인생 뜰 것이다
스무 살 적, 꽉꽉 막힌 미련함은 안녕이다
가방 끈 길이를 내 몸에 맞춘다
가슴 속 CC카메라가 꺼진 지 오래
졸업 후 2년 간 마음 고생이 많았다
이젠 모든 게 잘 될 것이다
나는 잘 나가는 직장인이니까
가방 정도는, 마음에 드는 걸 가져도 좋을 것이다
이건 그때까지의 별 것 아닌 상징
약간은 하고 싶었던 폭력
내가 나를 업는다
살 땐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