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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운이 없는 편이었다.
내가 태어나면서 집의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고,
내 아버지라는 남자는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이며
틈만 나면 나로 하여금 가출이나 자살, 혹은 살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분이었다.
물론 내가 깐깐한 편이라 더욱 그렇게 느낀 것이기도 하지만.
고등학교 때 집은 압류되어 경매처리 되었고,
어머니는 당시 어른들 기준으로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분이었는데
아버지의 뒤치닥 거리를 하다 빚만 지고 고생만 하시다 암에 걸리시더니
작년에 돌아가셨다.
요즘 보험광고 때문에 보험공부를 좀 했는데,
종신보험을 꼭 들어둬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식으로부터 부모를 모두 뺏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버지가 밖에서 일을 할 경우, 어머니가 집에서 아이와 지내는데
만약 아버지가 대책 없이 죽어버리면, 어머니가 일을 하러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가 죽음으로 인해서 자녀는 부모 모두를 잃어버린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아버지들은 꼭 종신보험을 들어두라고...
그런데 내 경우,
아버지가 팽팽하게 살아계실 때부터 어머니가 일을 하셨어야 했는데
어머니의 수입은 아버지의 좆같은 사업 밑천으로 들어가고도 모자라
어머니는 일과 집안일 짬짬이 빚을 얻으러 다니셔야 했다.
그러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남겨졌으니
내가 어떻게 운이 없다고 하지 않을까.
나는 25살 때까지 나이키 제품을 단 하나도 가져보지 못했으며
어머니가 생일 선물로 사줄라치면
아버지가 "애 한테 뭐 그딴 거를!" 하면서 뺏어 돈으로 바꿔오게 만드는
생일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겨우겨우 고비고비 넘어가며 나이를 먹던 소년이었다.
울면 맞아서 울 수도 없었다.
스무 살부터,
헉헉대며 돈을 벌어야 했다.
멍청한 나는 사립대와 국립대의 등록금 차이가 그렇게 클 줄은 상상조차 못했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통금시간 있는 기숙사 생활은 못한다며 자취를 했고
자취비용과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600원인가 700원으로 5일을 버틴 적이 있는데
그걸로 아껴 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돈이 들어오기로 한 5일 가량을 여기서 얻어먹고 저기서 얻어먹으며 살았던 건데
정말로 이러다 도둑질도 하겠구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들에게 돈이라도 꾸었으면 되었을 걸,
그때는 그걸 잘 못했다.
가난뱅이로 보이면, 정말 가난뱅이가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25살 부터는 그래도 나름
삶을 즐긴 것 같은데
24살 겨울까지는 여유롭거나 삶이 즐거웠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25살 때부터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쪼들쪼들하던 가슴이 이런 저런 일을 겪다 보니 제법 대범해져서 그렇기도 하고
자취 및 학교생활 및 돈벌이의 경력이 쌓여가면서
제법 수완있게 돈을 벌고 쓰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마디로 돈이 없어서 대학을 8년만에 마친 건데
처음에는 '빚'이 소름 끼치게 지겨워서
어떻게든 빚지지 않고 대학을 마치기 위해 장학금을 타거나
장학금을 놓칠 경우에는 휴학 후 등록금을 모았었는데
나중에는, 이러다간 끝이 나지 않겠다 싶어서 2학기 분의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대출 받으려고 처음 간 은행에서
보증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어머니와 동생과 아버지의 이름을 차례로 불었는데
세 명 모두 신용불량자였다.
도박중독자처럼, 아버지는 이 사람 저 사람의 신용을 끌어들여
신용불량자로 만들어 놓고는
가오를 세운답시고 자기 친구의 보증을 섰다가 친구가 도망가서
그 빚까지 식구에게 툭, 떨어지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면 식구 중에 사고를 쳐서 식구를 피곤하게 만드는 녀석이 하나씩은 있던데
우리집의 경우는 그게 아버지였던 것이어서
누가 중재할 사람이 없었다.
작년 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6개월 쯤 전에
머리카락이 없는 쭈글쭈글한 엄마와 밥을 먹다가,
"엄마,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 차라리 하지 말지."
라고 말했더니 엄마가 많이 울었다.
내가 작년 대홍기획에서 처음 '인턴'을 시작했을 때 가장 놀란 것은
그곳 대다수의 사람들과 내가
기본적으로, 살아온 삶의 카테고리가 다르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보다 높은 곳과 앞을 보지만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97년 1학년 때 동기들은 50명에 가까웠는데
편입이나 재입학한 녀석들을 빼고
힘에 겨워 학교를 포기한 채로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녀석들이 7~8명은 되는 것 같다.
척 보기에도 쪼들려보이는 녀석들이어서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억울함을 많이 느꼈고 분노도 많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런 한 편, 술집에 모여서 오도방정 떠는 모습들에 냉소를 보내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친구 교제가 거의 없었다.
수업을 듣거나 일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거나 잠을 자거나 남는 시간엔 글을 썼다.
그러다보니 지도교수님이 등 밀어줘서 총장상도 받고 장학금도 받고
어찌어찌 등단도 했다.
지도교수님은 한 달에 한 번 5만원씩 뭉텅이로 학교식당 식권을 사주시거나
연구실 청소좀 도와달라고 하더니 수고했다고 15만원을 주기도 했다.
바람은 좀 쏘이냐? 하시며 차를 태워 산가나 강가로 데려가더니
꿩만두국이나 보쌈을 사주시기도 했다.
나는 5만원어치 식권 뭉텅이를 학과 사람들에게 조금씩 팔아서 필요한 걸 사고는 했다.
하이페츠 CD 같은 거...
글 없이는 못 살것처럼 굴러다니던 선배들이
4학년이 되자 공무원시험이며 영어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나와 죽을 뻔 했다.
나는 소위, 선배 알기를 뭣처럼 아는 후배군에 들었는데
부모에게 용돈 받아서 여자후배 밥 사주는 모습을 보며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걸 봐도 구역질 안 난다. 많~이 사회화 되었다.)
졸업했다고 뻥치고서 학습지 방문교사나 학원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는
내가 나중에 뭐가 되든지 간에
학원 선생만은 하지 말자, 라고 다짐했는데
가르치면 가르칠 수록 내가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들만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뭐해먹고 사나... 생각하던 나는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는 것 중에 방송작가와 카피라이터를 생각해냈다.
한 달 동안 둘 중 뭐를 할까 생각했는데
역시 둘 다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인 것 같고
카피가 방송대본보다 짧으니까 카피를 하자,고 결심해버리고 복수전공 신청을 했다.
수업을 듣던 중에
당시 강의를 하던 현직 제일기획 차장 CW 눈에 들어서
인턴을 하고 카피를 배우고 직업을 갖게 되었다.
오늘
새로운 디자이너 차장님이 한 분 회사에 오셨다.
내가 마중 나가서 여기저기 안내해 드렸는데, 사원이라는 내 말에
"어머! 보이기는 나랑 비슷한 연차로 보이는데..."라고 말씀하시기에
속이 상하려다가,
"얼굴이 예쁜 분이 이렇게 말하니까 속상하지도 않는구나"하고선 실실거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이런 건 쉽게 떨쳐지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게 뭐냐면, 지방대생이라는 것, 남들보다 늦다는 것, 영리하지 않다는 것, 영어를 못한다는 것, 등의
궤적이라고 해야하나...
내가 인턴을 시작한 게 28살 11월이었다.
한국 광고계는 나이 서른이 넘으면 신입사원이 되기 어렵다.
내가 인턴을 4개월 째 하고 있을 때, 대홍기획에 신입사원들이 들어왔다.
서울대, 연대, 고대, 서강대, 성균관대는 기본에 영어실력은 필수고
유학경험자도 많고 4개국어를 하는 카피라이터도 있었다.
그리고 모두, 나와 동갑이거나 나보다 어렸다.
(지금 내가 있는 맥켄의 경우는 기획 3명 중 1명은 해외유학파거나 혹은 교포거나 혹은 외국인이다-_-)
28살 봄에 졸업한 나는, 일자리를 알아보기는 커녕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여행 떠날 계획만 세우고 있었다.
20살 때부터 파리를 가는 건 '꿈'이었는데 정말 꿈만 꾸고 말았다.
나중에 취직 후 돈 벌어서 가게 되면 그건 '꿈'이 아닌 것 같아서 불안했다.
여행 먼저, 취업은 나중이라 생각한 나는 남들 취업자리 알아볼 때(어머니가 응급실에 계실 때)
프랑스로 떠났는데 계획은 돈 떨어질 때까지 파리를 배회하다 돈 떨어지면
프랑스 지방 어딘가로 찾아들어가서 포도밭에라도 가서 일해볼까... 하는 거였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돌아오려고 했는데...)
센 강에서 강물 소리 들으며 노숙하던 나는 가방을 도둑 맞고
경찰서 가서 하루 자고
게이 집에서 하루 자고
디귿자<ㄷ>를 엎어놓은 것 같은 건물 아래서 하루 자고
개선문 아래서 낮잠 자고 하면서 살다가
날이 추워져서 어찌어찌 15일 만에 귀국했고,
어머니 장례를 치렀고,
11월부터 광고회사 인턴을 시작했다.
광고회사 사람들이 자주 하는 얘기 중 하나가 연봉 얘기인데
상당수가 불만족을 얘기한다.
매일 야근하는데... 몸 버리며 일하는데... 연봉이...
올해 29살에 경력 1년차 카피라이터인 나는
내 연봉에 매우 만족스럽다.
살면서 내 통장에 100만원 이상 모아본 적 없으니까.
살이 뽀얀 결혼 1년차 여성 디자이너 차장님이 기품 있는 자태로
한 쪽 팔에 루이비통 가방을 걸치고 서있는 모습을 훔쳐보며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내가 남들 코스보다 2-3년 늦었다면
남들보다 2-3년 더 오래 일하지 뭐, 라는 생각을 한다.
면허학원 등록해서 면허도 따고
오토바이도 사고
영어도 조금씩 배워서 나중에 영어로 뭘 좀 써보고 싶고
운동은 주기적으로 하고...
죽음을 겁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이렇게 자신의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다 보면
내가 혹시 노출증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 때도 있다.
그러나 한 편,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내 삶을 남들에게 얘기했을 때 창피하다면
그건 남들에게 애기 하지 않더라도 창피한 삶이다.
나는 내가 무척 운이 없었던 것 같으면서도
오늘 찬찬히 돌아보니 운이 제법 있는 것 같다.
2
나는 남들이 자기 얘기 하는 것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과거(기억)는 현재에 의해 각색되기 마련이고
내가 기억하는 내 과거의 모습조차 디테일한 감정이나 상황에서는 정확함을 자신할 수 없다.
자기 소개를 하는 자리, 술을 마시며 또 지들 얘기를 하는 자리에서
나는 늘, 어디까지 자신에 대해 애기해야 하는 지를 가늠하며 피곤해진다.
상대방이 어디까지 나에 대해 알고 싶은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나의 경우
그렇고 그런 얘기들을 듣다 보면 밖에 나가서 책이나 읽고 싶어지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당신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고, 흥미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티를 내기 위해서 애를 쓴다.
그런데 또 그런 티를 내다 보면, 상대방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두루두루 피해다니다가는
종래 내게 부담스러움을 표시하고는 한다.
"우리가 그런 얘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그러면 나는 "아... 네~ 그렇죠"라고 대답하고는
"광고는 언제부터 좋아하시게 됐어요?"하고 묻게 된다.
그러면 상대방은
"예 고등학교 때부터요~"(1번)나
"대학 들어가서 이것 저것 해보다가 우연히..."(2번)나
"000광고를 보고나서 반했어요"~(3번)나 그런 류의 대답을 한다.
그걸 한 참 듣고나서 집으로 오는 길에
1번 대답과 2번 대답과 3번 대답을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헷갈려한다.
그래서 택시 기사아저씨가(간혹 아주머니가)
"여기서 어디로 가요?" 하고 물으면
"헷갈리다구~~!!!" 라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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