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해 있을 때
표정도 눈빛도 멍 하다는 것을 
본인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멍 할때
후뇌가 말을 합니다. 

보통은 좌뇌와 우뇌가 생각을 이끌어가고
투쟁하고 열 받고 지끈거리고 막막해하지만
멍 해 있는 동안은 저기 우물 바닥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로
후뇌가 말을 시작합니다.

이 말은 바른 정신일 때에는 
바른 정신들의 에너지에 눌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른 정신들이 공회전을 하며 
나로부터 살짝 바퀴를 들어올리고 있는 동안에는
저 밑에 아주 작은 로울러가 나를 문지르며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마치
"나는 지금 너의 운명을 이야기 하고 있어. 하지만 너는 듣지 못하고 있지."
라는 느낌을 주고는 합니다. 그리고 그 느낌대로
나는 도무지 그 이야기를 알아듣거나 
잡음 없이 깨끗하게 저장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느낌을 외부에서도 느낍니다.
선선한 바람이 나를 지나갈 때
손가락을 레코드 바늘처럼 구부려서
바람의 길 위에 가만히 올려 놓습니다.
그러면 바람의 말 소리나 
할머니의 머리카락 같은 하얀 줄기가
손가락 사이로 술술술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바람의 줄기 하나하나가 배합되고 엮여서
지금의 내 주위를 이루고 내 삶을 조정해 온 듯한 느낌에 빠집니다.
그러면 이 줄기를 움켜쥐고서 물바가지에 국수를 풀듯이
잘 풀어서 시원스레 내놓고 싶습니다. 
내 운명 한 사발을.

그러나 정작 바람의 줄기의 가장 가느다란 
뉴런 같은 솜털까지도 모두 볼 수 있게 된다면
난 제자리에 멈춰서 숨도 쉬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 복잡하고 너무 연약하고 너무 끈적거려서.

오늘도 머리가 아파서
잠시 멍하고 후뇌의 잡음을 들었습니다.
마치 외계에서 신호가 오는 것처럼
나를 설레고 답답하게 하고.
중력으로부터 놓여지는 듯한 느낌으로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다시 
미친듯한 소음과 함께
좌뇌와 우뇌가 나를 갉아먹습니다.


   

 

 

ps. 2003 년에 썼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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