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별로 근거 없이 행동하고 판단하면서도
연애, 에 한해서는 유독 근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는 나를 왜 좋아하니?”라는 질문이다.
(김밥을 좋아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김밥을 좋아하는지 특별한 근거를 찾지 않는다.)
좋아한다는 상대방의 말을 못 믿기 때문에
그 근거가 있어야만 믿어주겠다는 걸까?
혹은 그 근거의 질을 따져서
마음에 드는 근거라면, 이 사람의 좋아하는 감정의 가치를 높게 쳐주고
마음에 들지 않는 근거라면, 이 사람의 좋아하는 감정의 가치를 낮게 잡겠다는 걸까?
예를 들어서
“너의 쫙 빠진 몸매와 남자들을 사로잡는 예쁜 얼굴이 좋아”
라고 하면,
‘내 외모만을 좋아하니까 이 사람은 나를 진정 좋아한다고 할 수 없어.’
라고 판단이라도 할 건가?
반면,
“너의 말씨라든지, 이러저러한 너의 행동이 아름답고 이상적이어서 좋아”
라고 하면,
‘내 성격과 내면을 살필 줄 알고, 그런 나의 내면을 잘 아니까 진정 날 좋아하는 구나’
라고 판단 할 건가?
그렇다면 이건 뭔가 이상하다.
약간, 과장해서 예를 들자면,
외모를 근거로 ‘미치도록 정말 강렬하게’ 좋아하는 감정과
내면을 근거로 ‘어느 정도 괜찮게’ 좋아하는 감정 중
내가 보기엔 감정의 정도로서는 전자가 더 풍부하고 강렬한데도
가치로는 후자가 더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나는 대부분 여성의 내면 보다는 외면을 통해
좋아하는 감정을 크게 느끼게 된다.
내면이 존경스러울지언정,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때는 거의 없다.
반면 외면을 통해서는 보다 즉각적으로 강하게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고
이것은 내면에 대한 감동에 비해서 훨씬 더 ‘연애의 감정’에 가깝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나를 왜 좋아해?” 라고 말하면
나는 “예뻐서” 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여자는 “더 예쁜 여자가 나타나면 나를 안 좋아하겠네?”라고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의 모순은
“너의 마음이 예뻐서 좋아”라고 하는 남자도 얼마든지
더 마음이 예쁜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경우 여자는
오직 나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이유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서
“너가 먼저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그 이유를 말해줘”라고 물을 경우
여자 역시 뭐라 대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이유는, 너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차별화된 절대적인 이유는
“없거나!” 혹은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봐야 겨우 알 듯 말 듯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런 질문
“너는 나를 왜 좋아하니?” 라고 종종 묻는 버릇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직 자신만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를 끊임 없이 생각하도록 함으로써(답이 없으므로 계속 생각할 수 밖엔 없다) 계속 자신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고
어떤 식으로든 얽매게(자신에게 소속되게) 만드는 소유화 작업이 아닐까?
물론, 이런 식의 의도를 가지고 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대부분은 감성적 만족을 얻고자 하는 낭만적 취향을 지니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질문의 성격은 다분히 위의 소유화 작업을 띄는 것이 사실인 듯 하다.
이런 질문과 유사한 질문으로는
“나를 좋아하는 이유 100가지를 대봐” 라는 것이 있다.
이 질문의 경우, 상당히 탁월한 기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얼마나 성심 성의껏 열의를 가지고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만큼 자신을 좋아하는지 대략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지간히 좋아하지 않고서는
100가지 200가지 이유를 꼼꼼하게 그것도 밤을 새가며 즐겁게 생각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또한 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그리 좋아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과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의 목적은
얼마나 독하게 마음 먹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구별해내고자 함일까?
혹은, 이렇게 독한 마음을 먹고 작성한 100여 개의 이유 목록 작업에 대한
투자가 아까워서 쉽사리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일까?
내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뭐가 딱히 못마땅해서는 아니다.
다만, 감정은, 특히 좋아하는 감정은, 비교하고 등급을 매기고
어떻게 내 뜻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가 너만을 좋아하는 이유를 수 천 가지를 생각하고 적기도 한다.
감정이 풍부한 때이고, 에너지가 풍성할 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다.
“나를 왜 좋아해?”라고 묻고 싶은 사람은
“나는 이래서 너를 좋아해” 라고 먼저 얘기를 해주는 건 어떨까?
물론, 내가 먼저 얘기했으니까 너도 얘기해줘, 라고 말하는 순간
이건 교환 가치로 가치절하 되겠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내 안에 너의 비중을 매우 높은 상태로 두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나를 왜 좋아해?”라는 물음은 “나”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이 문장의 주인공은 ‘나’인 것이다.
이 질문 자체가 상대방을 위함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질문이다.
상대방을 위함이 아닌 나를 위한 질문을 하면서
그 질문의 대답에 따라 행여나 상대방에 대한 가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놀랍도록 냉정하고 계산적인 방식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 질문은,
상대방이 나를 어떤 이유로 좋아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거야, 라는 확고한 신념이
바탕이 되어야 그나마 연인 사이 오갈 만한 대화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똥 퍼먹는 김태희”를 좋아할 남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다시 말해 “예뻐서 좋아”라고 말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상대의 성격과 태도 심성 같은 것이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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