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염려했던 것
우울함으로부터 이탈되는 것
그것이... 예상했던 대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무슨말인가 하면,
우울하지 않아졌다,
는 것이다.
뭐야! 우울해지지 않아진 것 가지고 이런 단 말인가?
라고, 다른 사람이 들었다간 화를 낼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뭐랄까...
적절한 우울함의 농도를 즐긴다는 것은
사실 매우 탁월한 즐거움 중 하나이다.
진한 블랙 커피에 물이나 설탕을 얼만큼 넣을까 하는 즐거움처럼
피로한 몸으로 욕조에 물을 받으며
물의 뜨거운 정도를 얼마만큼 깊이는 얼마만큼 할까를 가늠하는 즐거움처럼
그건 정말
어지간해서는 즐기기 힘든 고급 즐거움이다.
우울함을 즐기게 될 경우, 즐거움 이외에도 아주 여러가지
헤택이 따라오는데,
예를 들면 하루 종일 문자 하나 전화 한 통 없어도
안달할 일이 없고,
심심해서 우왕자왕할 일도 없다.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1시 방향에 떠있는 태양이
8시 방향까지 침몰하는 것을 가만히 쳐다볼 수 있는 건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런 기분을 견디고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우울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게끔 해준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우울함을 키워왔는데
여기서 키워왔다는 것은
그것에 함몰되어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즐기고 필요에 따라서 이용할 수 있게
즉 나에게 잘 맞도록 서로 맞추어 왔다는 것이다.
그야 이렇게 말로 해놓으면 그럴싸 해보이지만,
하루종일 말 한 마디 없이 가만 있는 초등학생은 좀 불쌍해보이기도 했을 거다.
사실 그게 그렇게 좋았던 것만은 아닌데,
대인관계가 서툴러지는 것은 물론이고,
타인(사람)에 대한 관심 자체가 아예 없어져서
25살이 될 때까지 여자와 사귀어보지도 못하게 된다거나
뒤늦게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을 터득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거나
남들이 이미 자연스레 몸에 받아들인 술자리 예절 같은 것들을
거북스럽게 따라해야 하며,
가장 큰 데미지는,
그렇게 의식적으로 따라하다가 동화되어가는 자신을
엄연히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경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울함은 묘해서,
우울함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써도 잘 안 떨쳐지지만,
정작 우울함에 젖어 보려고 해도
그 감이 사라지면 되돌아오는데 오래 걸리게 된다.
대학 3학년 2학기 정도 되었을 때,
내가 리포트며 시에
가난에서 소재를 따와 써서 좋은 결과를 보는 때가 많았다.
그러자 당시 친하던 한 후배는
"형! 형은 왜 맨날 가난함을 울궈먹어?"라고 불만 섞인 질문을 했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진 게 그것밖에 없는데 어떡해!!"(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글쎄, 가난이란 것이 상대평가로 측정되는 것인지
절대평가로 측정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이 타인의 가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아가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보다 높은 곳과 비교하는 버릇만 들어 있는 걸 봐서는
절대평가가 맞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당시에 나는
남들만큼 시간도 없고(돈을 벌기 위해 다른 걸 하는 데 시간을 써야 했으므로)
돈도 없고, 친구도 많지 않으니까, 제법 많이 갖고 있는
가난을 이용해 먹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가난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우울,도 넉넉히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2007년에 대학을 들어간 나의 동료들에게는
시대적 우울함이라거나 그런 건 별로 없었고
다들 재밌게 바쁘게 스타크레프트 같은 걸 하면서 잘 지냈고
4학년 쯤 되면 공무원 시험 준비나 영어 준비를 하게 되니까
뭐랄까... 근본적인 우울함을 크게 느끼며 사는 동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학과 공부에 있어서나 시를 쓰고
과분하게도 등단을 하게 되는데 있어서도
우울함은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나의 등단작 심사평을 보면, 너무 실존주의적으로 세상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젊은 나이에 조심해야 한다는 정도의 내용이 있다.)
자유나 마음의 평화, 사랑 같은 것을 돈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 우울함(원하는 종류의 우울함)도
돈 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 같다.
우울함을 다루다 보면, 이것이 쓸 수 있는 우울함과
쓸 수 없는 우울함 등 다양하게 그 질감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막에서 막 퍼올린 석유로는 자동차를 달리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우울함도 어떻게 가공시키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뭐랄까, 내 경우에는 우울함에 결이나 농담이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그 우울함의 물결 같은 것을
생전 들여다 볼 일도 없고 손이 닿을 일도 없는
폐와 갈비뼈 사이나 심장판막 사이 같은 곳에 흘려 보내서
내장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걸 상상하고는 했다.
그것은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데,
내가 평소 느끼지 못하는 내 몸 속의 곳곳까지
우울함을 통해 하나로 만져지는 느낌,
내가 나고, 이 느낌이 나로군, 하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꽤 기분이 좋아서, 우울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 된다.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느낌 같은 것...
그러나 때로 불시에 찾아오는 우울이 있는데
특히 밤에 자주 찾아오는 이것은
이대로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하게 만든다.
어제가 바로 그런 날이었는데,
한 시간 가량 새벽녁 캄캄함 속에 웅크려 누워서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죽을 텐데,
내일 또 해야 하는 것들이란 남들도 다 하는 것들...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을 자주 하다보면 시가 제법 잘 써진다.
시 쓸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대체 무엇을 쓰고
대체 이것을 왜 쓰지?
라는 점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우울함은
잘은 설명이 안 되는데, 암튼 대답이 되어준다.
명확하다고 할까...
이 감정이 진실이다... 하는 느낌이 된다.
만약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할 수 있다면,
그 기분으로 사랑의 시를 써도 좋을 것이다만,
불행히도 내 삶을 24시간으로 치면
사랑으로 충만했던 경험은 1.5초 정도랄까...
아무튼 내가 30년간 경험과 생각을 통해서 무언가 이뤄온 것이 있다면,
그건 나만의 우울함일 것이다.
이 내 전용 우울함에 내게 필요한 것들이 잘 준비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들,,,
회의와 일, 커뮤니케이션, 시간 엄수, 프로그램들로 인해
우울함의 마개를 계속 덮어두게 되니까
우울함이 점점 낯설어지고 내 것이 아닌 듯 여겨지게 된다.
멋진 승마 경주를 위해 30년간 말을 길들여 왔는데
근 1~2년 동안 말을 마굿간에 넣어 놓고 타질 않아서
감이 무뎌지게 되는 것과 같다.
아, 어떻게든 회사 속으로
내 일터 속으로
현재의 내 삶 속으로
우울함을 끌고 들어와야 한다.
이곳에서의 나에게도 그것이
작작하게 차올라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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