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학고재, 2007-09-29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내가 이미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땅 위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나를 황제로 여김은 천도에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또 내가 칙으로 명하고 조로 가르치고 스스로 짐을 칭함은 내게 속하는 일이지, 너에게 속하는 일이 아니다.
네가 명을 황제라 칭하면서 너의 신하와 백성들이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까닭을 말하라. 또 너희가 나를 도적이며 오랑캐라고 부른다는데, 네가 한 고을의 임금으로서 비단옷을 걸치고 기와지붕 밑에 앉아서 도적을 잡지 않는 까닭을 듣고자 한다.
작은 두려움을 끝내 두려워하면 마침내 큰 두려움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임금이니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하라.
너의 좁은 골짜기의 아둔함을 나는 멀리서 근심한다.
성 안 마을은 하늘이 넓어서 해가 길었다. 순한 물은 여름에도 땅을 범하지 않았다.
… 그리 되었으니 그리 알라. 그리 알면 스스로 몸 둘 곳 또한 알 것이다……
겨울 새벽의 추위는 영롱했다.
김상헌은 사공의 목덜미며 몸매를 찬찬히 살폈다. 야위고 가는 목에 힘줄과 핏줄들이 얼기설기 드러나 있었다. 힘줄은 힘들어 보였다.
깎고 쪼고 뚫고 파고 훑고 후비고 깨고 베고 거두고 찧고 빻고 밀고 당기는 모든 연장들이 서날쇠의 대장간에서 나왔다.
미끄러운 오르막에서 군관이 예판을 부축했다. 온산에 찬비가 골고루 내려서 피할 곳은 없었다. 군병들은 수목처럼 젖어 있었다. 솜옷이 젖고 얼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얼음이 서걱였다.
김류의 말은 임금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임금은 오래 울었고 깊이 젖었다. 마루 위에서, 서안 앞에 앉은 젊은 사관이 벼루에 먹을 갈며 마당에 쓰러져 우는 임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사관이 붓을 들어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사관은 울지 않았다. 낮에 비가 그쳤다.
정명수는 은산 관아의 행랑에서 태어났다. 아비와 어미가 모두 노비였으므로, 정명수는
극천(極賤)이었다. 노비가 왜 자식을 낳는 것인지 정명수는 알 수 없었다.
정명수는 누이의 죽음과 어미 아비의 죽음에 편안했고, 죽음으로써 혈육의 관계에서 놓여나는 끝장이 홀가분했다. 목숨을 점지하되 혈육의 관계를 맺지 않는 새나 짐승이 정명수는 부러웠다. 혈육 없는 세상은 짐을 벗어 놓은 듯 가벼웠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 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린 말들은 묶어 두지 않아도 멀리 가지 못했다. 말들은 모여 있어도 제가끔 따로따로인 것처럼 보였다.
말들의 죽음은 느리고 고요했다. 말들은 천천히 죽었고 질기게 숨쉬었다. 옆으로 쓰러져 네 다리를 길게 뻗은 말들도 사나흘씩 옆구리를 벌럭거리며 숨을 쉬었다. 숨이 다한 직후에 묵은똥이 비어져 나오고 오줌이 흘러나오는 소리 외에는, 말들은 죽을 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 콩은 한 알씩 침으로 녹여서 오래 먹어라. 먹을 것을 지니면 덜 춥다.
- 발을 늘 깨끗이 씻어라. 발이 더러우면 얼기 쉽다.
아침 수라상에 졸인 닭다리 한 개와 말린 취나물 국이 올랐다. 국은 간이 엷어서 뒷맛이 멀었다.
임금은 경서를 읽듯이 찬찬히 먹었다.
서날쇠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장작을 뽀개거나 땅을 팔 때 그의 몸은 일 속으로 녹아들어가 힘을 써도 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마루가 어두워질 때까지 임금은 아이를 앉혀 놓고 들여다 보았다. 김상헌은 백성의 자식을 글 읽듯이 들여다보는 임금의 모습에 목이 메었다.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오목한 성 안에 낮에는 빛이 들끓었고 밤에는 어둠이 고였다.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면 어둠은 먼 골짜기에서 퍼졌다. 빛이 사위어서 물러서는 저녁의 시간들은 느슨했으나, 어둠은 완강했다.
- 다녀오겠느냐?
- 조정의 막중대사를 대장장이에게 맡기시렵니까?
- 민밍한 일이다. 하지만 성이 우태로우니 충절에 귀천이 있겠느냐?
- 먹고 살며 가두고 때리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소이다.
끌려오는 여자들이 강을 건널 때 청병들이 등에 업힌 아이를 빼앗아 언 강에 던져서, 송파나루 앞강에는 머리가 처박히고 다리가 처박힌 어린아이들의 주검이 얼음에 줄지어 꽂혀 있다고 땅꾼은 말했다.
그믈달이 올랐다. 북문 밖은 다시 고요했다. 비탈에 쓰러진 사체 주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덜 죽은 자들이 북문을 향해 눈비탈을 기어오르다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냉이는 본래 그러하듯이 저절로 돋아났는데, 백성들은 냉이가 다시 겨울을 견디었다고 말했다. 냉이의 말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었다. 뿌리가 깊어야 싹을 밀어 올린다, 봄은 지심(地心)에서 온다고, 냉이를 캐던 새남터 무당이 말했다.
겨우내 묵은 몸속으로 냉이 국물은 체액처럼 퍼져서 창자의 먼 끝을 적셨다.
- 우리의 길은 매한가지라는 뜻이옵니다.
최명길이 말했다.
- 제발 예판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고.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 아니다. 그냥 둬라. 저들은 저래야 저들일 것이니…….
- 조선의 봄은 어린 계집과도 같구나.
군막 너머로 봄이 오는 강을 바라보며 칸은 중얼거렸다.
칸은 붓을 들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칸은 고사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체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을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늘 말했다.
- 말을 잡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너는 내가 군사를 돌이켜 빈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느냐, 삶은 거저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미 말했다.
올봄은 해가 곱구나, 꼭 저승에 내리는 햇볕 같구만…….
구들이 일찍 식었고 노복은 잠들었다. 붓끝이 얼어서 종이가 서걱거렸다. 연지에 고인 묵즙에도 살엄음이 잡혔다.
마지막 몇 글자가 마르기 전에 얼어서 종이가 오그라져 있었다. 최명길은 아침 햇살에 글자들을 녹여서 말렸다.
- 며칠 전 성첩에 올라가서 삼전나루 쪽을 살폈사온데, 물빛이 푸르게 살아 났고 먼 상류부터 물 위에서 햇빛이 튕기면서 흘러 내려왔으니, 송파강은 이미 녹은 것으로 아옵니다.
- 알았다. 당분간 살아 있으마. 미음을 가져와라.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 - 오탁번 (0) | 2007.10.02 |
---|---|
W Korea - SEPTEMBER 2007 (0) | 2007.10.02 |
가이아 - 제임스 러브록 (0) | 2007.09.29 |
씨네21, 619호 - 동호정보공고 이야기 (0) | 2007.09.12 |
시안 2007년 가을 (0) | 2007.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