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슬럼프다.

삶의 방향성을 읽어버렸다.

어디를 향해서 어떻게 를 찾기 위해 계속 애쓰던 것이

중단된 상태고,

회사에서 회사를 위해 회사와 함께, 더구나 회사에 맞춰 의 삶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과연 별 거부감이 없는 걸까.

혹은 술도 잘 못 마시는 주제에 하루도 빠짐 없이

하루 한 두 병의 맥주를 마시고

싸구려 와인을 마시고

그렇게 몸과 생각을 마취시키는 것은

그 거부감을 마취시켜 무감각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닐까.

심지어 광고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런 류의 고민을 한다는 것을 회사 사람들이 알면

배부른 고민이라든가, 쓸 데 없는 고민이라는 소리나 들을 것 같다.

광고회사는 크리에이티브를 하는 곳이고,

크리에이티브란 생각과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다들 이런 종류의 고민은 하며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2년 정도 보고, 듣고, 관찰해본 결과,

이런 고민을 하는 이들은 한 둘씩 회사를 떠나고, 혹은

떠나게 만들고

이런 고민을 티 나지 않게 하거나, 별로 하지 않는 이들만이

건조하게 남아서, 애 키우는 얘기나 하며 회사를 꾸려나가고 있다.

가급적이면 회사 사람들과는 사적인 자리를 피하려고 하고,

업무 외의 술자리를 빠져나가려고 애쓴다.

그 이유는 그 술자리에서 하는 얘기란 결국,

회사에 대한 불만이나, 업계 동향,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까,

애들 문제, 기름값이나, 회사 시스템의 문제, 유학이나 이민 같은 얘기들인데,

그런 얘기들의 저변에는 이미 안정되며 돈 많이 벌고 행복한 삶과 가정을 꾸리려는

방법에 대해, 별 감흥 없이 얘기하자, 는 그런 약속이 느껴져서

지루하다.

예를 들어, 회사에 이런 시스템은 문제가 있다, 는 얘기가 나오면,

맞다, 동의한다, 정말 그렇다, 딴 데는 이렇다던데, 정도의 얘기가 나오고,

그리고,

집으로 간다.

그냥 그러고 만다.

나는 목격한다. 이런 모습을.

그리고 닮아간다.

 

크리에이티브란 마음 혹은 생각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생각이 바뀌었다.

왜냐하면, 생각만 하고, 말만 하고, 현실적인 귀찮음과 애로사항에 부딪치면

금새 타협하고, 생각을 접고, 마음을 참는, 그런 사람들은 크리에이티브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티브란 따라서, 행동이다.

 

또 하나의 생각은,

닮은 사람들이 모여, 닮은 생각을 하는 데다가,

쉽게 동의가 이뤄지는 대화란, 결코 크리에이티브하다고 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크리에이티브의 속성은,

무리의 동의를 쉽게 얻을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 광고산업을 크리에이티브 산업이라 부르기에는

있다, 문제가.

나는 매일 매일 크리에이티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노멀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슬럼프다.

방향을 잃어버린다.

 

내가 취직을 한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그 중에 광고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글 쓰는 재주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난 취직을 했고, 광고회사에서 글 쓰는 재주를 나름 살리며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이다.

먹고, 자고, 단지 그것만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먹고, 자고, 그 외에 무엇을 위해서 난 돈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이 아마도, 내 삶의 방향성 일 것이다.

만약 그 무엇이 막연하며 무책임하게도 다만 행복이라고 한다면,

난 그 번 돈을 행복해지기 위해 사용해야 하고,

또한 일을 할 때도 행복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행복, 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것도 나름의 행복이야, 라고 말하면 어디에나 다 붙어 버리는

행복은 간사하다.

행복은 편리하다.

난 아마도, 충만해지고 싶었을 것이다.

가난, 돈 없음, 궁핍은, 배가 고프고, 좋은 옷을 못 입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사람으로서 내적/외적으로 충만해지기에 좋은 조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난 돈과 안정된 직장을 토대로, 보다 충만한 사람이 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 중에 내가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은, 충만이 아니라,

답답함과 쫓김, 불만이다.

답답함과 쫓김과 불만은 회사라는 시스템이 직원들을 사육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표준적으로, 노멀하게.

 

난 여름 휴가를 2번 잘렸고, 아직까지 가지 못했다.

부장님 말씀으로는 자기가 책임을 지고 올해가 가기 전에 보내준다고 하였지만,

나는 믿지 못한다.

할 수 없지라는 정신에 물든 분은, 은연중 다른 사람들에게도 할 수 없지 않냐를 종용한다.

휴가가 잘렸을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휴가를 갔는데 왜 나만 못 가게 해?라는 억울함.

이 회사는 가장 막내 사원이 가장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에 휴가를 못 가나?라는 어처구니 없음.

약속을 필요에 따라 바꾸는 이들의 모임에 내가 있군. 이라는 조소.

그래도 날 거둬준 곳이니 참자, 라는 묘한 받아들임.

휴가 정도로 자잘하게 마음 쓰지 말자, 라는 어설픈 깨우침으로 자기 속임.

내 꼭 기억해두자, 라는 앙심.

어떻게든 올해 안에 꼭 가자, 라는 다짐과 불안.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이런 생각들은 전형적인 노멀한 생각들이고,

회사가 휴가라는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좌지우지,

컨트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난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회사는 휴가,를 대체 어떤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수고한 자들에 대한 보상? 그렇다면 보상을 주지 않는 건?

필요에 따라 보상의 삭제? 그렇다면 나는 희생자?

나는 희생자로서의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

혹은, 휴가 따위의 도구로 인해 나는 회사와의 관계성의 고리를

마음에 걸지 않겠어.

그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겠어. 라고 할까?

그렇다면, 회사는 오히려 좋아하지 않을까?

휴가 안 가고, 일 하는 시간 늘고, 좋네. 하고.

그렇다면, 회사가 좋아하니, 나도 좋아해야 하는 건가?

혹은, 남의 휴가를 빼앗고선 저리 좋아하는 개심보를 보라! 격분하며 적이 되어야 하는 걸까?

회사 붕괴를 목적으로 삼아야 할까?

 

불행히도 나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가 없다.

더군다나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지나면서

이와 관련된 생각을 차츰 안 하게 되고, 잊어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처음 회사 생활을 하면서 문제점들을 발견하고, 나중에 마취되어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그래 나도 어릴 적에는 그런 생각들을 했지,

하지만 나이가 들다 보니 다 받아들이게 되더라고, 라는 식으로 변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능동적인, 충분히 생각된 받아들임일까?

내가 볼 때, 이것은, 생각과 행동의 포기, 기권에 가깝다.

그냥, 귀찮아, 피곤해, 내가 뭘 어쩌겠어, 라는 가치관이고

그런 삶의 방향성이 몸에 고착화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이 건에 대해 어떤 생각의 결론을 지을 수도 없고,

섣불리 어떤 행동을 결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바쁜 일들에 치이다 보면 이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빼앗기고

(이것이 회사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군대처럼, 소위 딴 생각 못하게 한다는)

무뎌지고,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식의 결론을 내릴 때까지, 잊지 않기 위해서

머리와 수염을 자르지 않을 생각이다.

지금 결심했다.

1.       휴가란 왜 있는 것인가?

2.       그 휴가가 있는 목적의 중요성은 나(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중요성을 지니는가?

3.       나는 언제 휴가를 갈 것인가?

4.       나는 이 휴가 잘림/밀림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5.       회사/조직에 의해 강요된 휴가 밀림/잘림에 대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것인가?

6.       회사는 날 다만 이용해먹을 대상으로서만 바라보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게 회사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

 

이빨은 깨끗이 닦고, 샤워도 말끔히 하고, 손발톱도 가지런히 자르지만, 머리카락과 수염은 자르지 않을 것이다. 이 생각이 마무리 될 때까지는.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김원국이 김원국에게 약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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