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파스칼 키냐르, 문학과지성사, 2005
음악가들은 어린애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결함의 주민들이다. 어린애는 유년기enfance*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바인 이 결함 속에서 최소 7년을 거주한다. 음악가는 노래를 통해 이 결함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작가는 이 끔찍한 공포의 영구 주민이다. 간단히 정의하면 작가란 언어가 마비stupor된 자이다.
(* ‘enfance’는 라틴어 ‘infans(말 못하는)’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단어는 그것을 노래하는 음악가, 그것을 발음하는 배우, 그것의 형태보다 의미에 몰두해서 따라 읽는 독자, 즉 그것을 다시 전사(傳寫)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쓴 작가에게보다 덜 어렵게 느껴진다. 작가는 단어를 쓰기 위해 그것을 탐색한다.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얼음덩어리 앞에서 일시 정지된 칼처럼, 글을 쓰는 사람은 고정된 시선과 경직된 자세로 빠져나가는 단어를 향해 두 손을 내밀어 애원하는 자이다. 어느 이름nom*이나 하나같이 혀끝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다.
(* ‘nom’은 ‘명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름이 필요할 때, 그것의 작고 까만 육체를 소생시켜야 할 사유가 발생할 때 그것을 소환할 줄 아는 것이 예술이다.
(*langue는 ‘언어’라는 의미 외에 ‘혀’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이란 살아가는 데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이라고 말했다. 봉오리bouton는 마치 나무에 움bouton이 트듯, 끼워진 단추bouton가 옷 위로 나오듯, 얼굴에 여드름bouton*이 나듯 그렇게 입 위로 돋아난다. 청소년들이 여드름을 흉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얼굴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지옥은 어디인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있는 어두운 강변, 숨결을 지닌 만물이 숨을 거두는 그곳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바람의 지배자는 바로 선원이다. 노르망디에서는 밭을 일구는 사람조차 선원이다.
1000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즈음, 노르망디 공국은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이 기독교인들이라면, 다른 쪽은 덴마크인들이었다.
“당신은 너무 많이 울어.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다니, 이제 당신을 디브라고 불러야겠어. 우리 마을을 흐르는 강의 이름을 붙여줘야 하겠어.”
“콜브륀, 내 이름을 기억하는가?”
“그럼요. 영주님의 이름을 기억하고말고요. 영주님이 알고 게신 여자분들은 자기 은인의 이름을 잊어버리나 보군요.”
“내 이름이 뭐지?” 영주가 물었다.
“내 혀가 그 이름을 가져올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내 입이 그 이름을 발음할 동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어서 이름을 말하라.” 영주가 큰 소리로 채근했다.
콜브륀이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아이드비크 드 엘이 당신의 이름이지요.”
그러자 영주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천지가 캄캄해졌다. 모든 게 꺼졌다. 지금 내가 말을 함으로써 꺼버린 이 촛불처럼.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끈다.
메두사의 시선과 마주친 남자가 돌로 변하듯이, 떠오르지 않는 단어의 시선과 마주친 여자는 조상(彫像)처럼 굳어진 모습이 된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언어가 우리 내면의 반사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인간은 눈으로 보듯이 입으로 말하는 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갑자기, 나는 성유물(聖遺物)이 빠져나간 성유물함이 된다. 성유물은 귀환에 동의하고 달아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엇에 대한 기억이 있다.
책들은 밭에 드문드문 드리워진 응달들이다.
잃어버린 단어의 탐색에서 침묵은 발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 탐색은 낮에 일어난다. 잠이 떠났으며, 어둠이 떠났으며, 꿈이 떠나버린 발기, 그것이 언어의 기능 부전이다.
죽음이 불행의 빛을 띠고 나타나서 불평에 머무르는 것, 다시 말해 삶의 피로와 추방된 사고에 머무르는 것도 오직 행복에서 출발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불교도들이 말하기를, 언어와 지시 대상인 실체 사이에 놓인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 눈물이 강가 강(江)*이다.
(* 인도의 갠지스 강의 힌디어식 발음.)
언어langue에 수없이 형용사가 나타나면, 그것은 언어langue가 없다는 기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머리칼과 목 사이에 포함된 부분을 ‘프로소폰prosopon’*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타인의-시선에-자신이라고-내어놓는-무엇’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 영어 ‘person’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어떤 단어를 찾아 영혼이 다른 세계로 떠나버려 ‘탈’로 변한 얼굴에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조바심을 치며 영혼과 단어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수사학(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청중을 무릎 꿇게 할 수 있는 담론의 추구일 따름이다. 고대 로마의 연설법 교사들의 말을 빌려 더욱 간단히 말하자면,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문장의 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왜 모두 여자일까? 남자는 여자를 수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든 남자든 모두 여자에 의해 수태되기 때문이다. 왜 메두사는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여자의 얼굴이 최초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세 여자 중에서 두 여자는 언제나 불사신이다. 세 여자 중에서 두 여자는 언제나 어머니이다.
왜 여자는 어머니가 되는가? 왜 여자는 아이를 낳는가?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것은 세대의 연쇄 고리 안에 죽음을 밀어넣어 연기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는 즉시 화급하게 바통을 넘긴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무엇의 바통을 넘겨버린다. 정면으로 마주 보면 안 되는 무엇의 바통을 건네준다. 얼굴 없는 앞면을 슬쩍 떠넘긴다. 울부짖는 임무를 더 젊은 여자에게 맡기는 이유는 홀로 지옥을 떠맡을 용기가 없어서일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죽음의 비명을 중단시킬 욕망을 표명한 적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에 불과한 이름 하나를 건네준다. 언어를 넘기는 것이다. 여자는 입을 벌려 울부짖으며 고통 속에서 낳은 어린애의 등에 죽음의 무게를 옮겨놓는다. 기원을 넘기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름을 전달한다. 어머니는 울부짖음을 전달한다.
혀끝에 있는 단어가 하나씩 죄다 종이 끝으로 옮겨질 만큼의 시간이 있으면 가능해진다. 그것은 글쓰기다. 글쓰기란 잃어버린 것의 시간을 취하기, 귀환할 시간을 갖기, 잃어버린 것의 귀환에 협력하기이다.
금단의 방에서, 계통 발생의 방에서, 남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철썩이는 것이다.
시란 오르가슴의 향유이다. 시는 찾아낸 이름이다. 언어와 한 몸을 이루면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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