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07(3쇄)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는 꿈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만나게 될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지 못할까?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둘 다 그때까지 미신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던 것, 즉 우리가 서로에게로 운명지어졌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무수한 사실들-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을 손에 쥐게 되었다. 우리는 둘 다 짝수 해의 같은 달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엄청나게 작은데도 결국 일어났다면, 운명론적 설명에 호소를 한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동전을 던졌을 때 왜 앞 또는 뒤가 나왔는지 설명해달라고 신에게 매달리지는 않는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인생에 있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의미도 우리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며, 두루마리 같은 것은 없으며[따라서 우리를 기다리는 미리 정해진 숙명은 없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기는 불안-간단히 말해서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해두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을 보장해주지도 않았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1905-94, 불가리아 태생의 유대계 영국 작가/역주)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 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 덕분에 우리는 습관이 된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지게 도니 어떤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 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 –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 – 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가방 좀 검사해도 되겠습니까?” 세관 직원이 묻고는 덧붙인다. “신고할 것이 있습니까? 술이나 담배나 무기나…….”
나는 오스카 와일드처럼 천재성을 발휘하여 “내 사랑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 사랑은 죄가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은.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도니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도 사랑을 믿지만, 그렇게 믿어도 되는 상황이 오기 전에는 아닌 척하죠.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뜻이다.
정확한 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확한 말을 의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다.
침실의 철학자는 나이트클럽의 철학자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존재이다.
나는 키스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둘러싼 공식적 신화이다.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하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400년 뒤의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주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니 드 루주몽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이 정열을 강하게 불태우는 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따르면 연인들은 누군가를 향한 갈망과 그런 갈망을 없애고자 하는 바람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침내 사전 없이도 농담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한 것이다.
곧 클로이를 알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이 훨씬 쉽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왜 공동체나 국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나라는 보통 그 구성원들이 고립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별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놓아두는 것일까? 왜 사랑, 친족관계, 형제애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는 나라들은 보통 그들의 주민의 상당 부분을 학살하게 되는 것일까?
마음이 좀 넓어지는 순간이면 우리는 낭만적 사랑이 기독교적 사랑과 비슷하다고 상상하곤 한다. 너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는 무비판적이고 너그러운 감정, 조건이 없고, 경계도 설정하지 않고, 구두까지도 모두 사모하는 사랑.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 그러나 연인들에게 말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기독교적인 사랑은 침실로의 이행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적 사랑의 메시지는 특정한 경우보다는 보편적 경우에 더 어울린다. 모든 여자에 대한 모든 남자의 사랑, 서로 코 고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두 이웃 간의 사랑에 어울리는 것이다.
왜 너는 연극을 그렇게 따분해하니? 왜 너는 꼭 백 년은 된 것 같은 저고리를 입으려고 하니? 왜 너는 자면서 이불을 침대 밖으로 밀어내니? 왜 너는 솔 벨로(Saul Bellow, 1915-, 미국의 소설가/역주)가 그렇게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하니? 어쩜 너는 아직도 주차를 할 때마다 바퀴를 보도에 걸쳐놓니? 왜 너는 자꾸 베개에 발을 올려놓니? 이 모든 것이 가정이라는 강제 수용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상대를 자신의 이상형에 더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일상적 시도들이다.
우리는 친밀함을 일종의 소유권이나 허가장으로 여겼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했을지는 모르지만, 이제 예의는 차리지 않았다.
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짜증의 벽들을 따라서 늘어서 있었다.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외 완환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사랑은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라는 마르시릴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99, 이탈리아 철학자, 신학자, 언어학자/역주)의 말이 맞다면, 클로이는 어떤 방식으로 나의 욕망을 충족시킬까?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클로이는 아름다움에 대한 플라톤적 관념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다. 이런 관념은 세계 패션 잡지의 편집자들도 공유하는 것이며, 이것이 거울 앞에 서는 여자들을 매일 자기 혐오로 몰아넣는 원인이 된다. 플라톤과 <보그> 편집자에 따르면, 각 부분의 균형 잡힌 관계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의 이상적 ‘형상(形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스탕달은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직 우리 감정을 언어로 번역한 적이 없었다. 우리 관계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핵심은 어쩐 일인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문제를 말하면 진짜로 문제가 생겨.” 그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시의 감정에 너무 신중하여 그것을 낭만주의자의 닳아빠진 사회적 언어로 말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사랑은 결국 나비 가운데 드문 색깔을 가진 종과 같아서, 종종 눈에 띄기는 하지만 결코 결정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사랑의 모든 언어는 과도한 사용으로 훼손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e, 1613-80, 프랑스의 작가, 모럴리스트/역주)의 말인데, 역사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잠시 나는 요구르트 병이 되어 그녀의 부드럽고 사려 깊은 처리 절차에 따라서 쇼핑백의 참치 캔과 올리브 기름 병 사이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공상을 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지겹다.
윌은 신중하게도 클로이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지 않고, 더 정확하게 내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클로이는 자기 눈을 두 손으로 가리고 가족에게 오빠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가족이 보이는 것과 똑같이 마음속에서 오빠가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오빠가 보이는데 왜 오빠가 죽었다고 하는가?
연인들은 오랫동안 철학자 노릇을 할 수가 없다. 연인들은 의심하고 캐물으려는 철학적 충동에 대립되는, 믿고 신앙을 가지려는 종교적 충동에 굴복한다. 연인들은 사랑 없이 의심을 하는 것보다 틀려도 사랑을 하는 모험을 더 좋아한다.
“…나는 혼자 살지 않으면 녹아버리는 사람이야. 내가 너를 원하는 않는다는 것이 아니야. 너만을 원한다는 것, 나한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거야...”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는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에 정통성을 부여해주기를 요구할 때 일어나는 문제는 정확한 정체성을 가지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될 위험이 생긴다는 것이다.
유년을 넘어서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내레이터 노릇을 해온 부모의 그릇도니 이야기를 교정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에 대항하는 투쟁은 유년을 넘어서도 계속된다.
그녀를 알기 때문에 그녀를 갈망하지는 않는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많은 부분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비록 잠시라고 해도 우리에게 심각한 행복을 안겨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스칼의 말이다.
프루스트는 무하마드 2세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는 하렘의 한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즉시 그녀를 죽이게 했다. 다른 사람에게 영적으로 종속되어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나는 당신이 내 얼굴보다는 머리를 칭찬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꼭 얼굴을 칭찬해야겠다면, [정적이고 피부조직에 기초를 둔] 코보다는 [운동신경과 근육이 통제하는] 미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젊은 벨트슈메르츠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 그동안 준비하지 않았던 아침 시리얼을 사러 동네 슈퍼마켓까지 갔다 오는 수고를 했겠는가? 그녀의 무관심이 아니라 의무감이 그녀를 고발하고 있었다.
일은 희비극의 시나리오로 풀려나갔다. 한편에는 여자를 천사와 동일시하는 남자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사랑을 병과 거의 동일시하는 천사가 있었다.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또 훨씬 덜 즐거운]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에서 우리가 의식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서 주어졌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절대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사랑은 첫눈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빠른 속도로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반 테러리스트들은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에 비해서 분명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요구[그것이 아무리 터무니없다고 해도]에는 모든 요구 가운데 가장 터무니없는 요구, 즉 나를 사랑해달라는 요구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해다오!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흔히 써먹는 지질하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나는 회사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왜 그들은 자신의 무의미함에 괴로워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했고, 그러다 클로이가 떠난 것이 아니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떠나도록 그녀를 사랑했다.
클로이가 진정 내 삶의 모든 것이었다면, 그녀 없이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삶을 끝내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을까?
인간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그 바람에 자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내 사랑 이야기는 얼음 덩어리와 같아서, 현재로 들고 오는 동안 차차 녹아버렸다.
로미오도 중매 회사를 통해서 좀더 적합한 짝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지혜의 대립물이란 지혜를 모르는 것[이것은 고치기가 쉽다]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아는 것에 따라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금욕주의의 핵심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실망시킬 기회를 주기 전에 스스로 실망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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