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07 겨울

 

 

 

 

 

 

 

 

 

범종의 젖꼭지

 

                   정진규

 

 늘 울어야만 하는 범종의 젖가슴엔 몇 채 유곽*이 소슬히 솟아있다 제 젖꼭지 제가 물려 제 슬픔의 허기를 제가 달래야 하니까

 

 

* 유곽 : 乳廓, 젖꼭지의 집.

 

 

 

 

 

 

 

 그런데 몇 해 전 또 우연히 추사가 영의정을 지낸 정치가이며 학자인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칠십년 열 틀의 벼루를 갈아 바닥을 내고 천 자루의 붓을 써서 닳아 없앴어도 아직도 편지 쓰는 법도 못익혔습니다”…

 

  내 젊은 날에 쓴 글을 두 차례나 불태워 없앴다고 했으니

 

 

 

 

 

 

 

말싸움, 염색약 발라가며

 

-         유안진

 

 소싸움은 있는데 말싸움은 왜 없냐고?

 말꼬리로 건드리면 더 기분 나빠져

 뜻 없는 말꼬린데, 말도 안 된다고

 히히 힝~ 말머리를 돌리지만

 말싸움은 늘 말꼬리 때문이지

 히히 힝?!

 말소리가 비웃는 소리와 비슷한 줄은 알지만

 한번 잡힌 말꼬리는 말머리를 돌려도 때는 늦지

 

 갓 눈뜬 침대에서

 망아지들이 먹고 나간 아침 말구유에서도

 잡히고 물리는 서로의 말꼬리

 사이좋게 외출해도 각자 따로 돌아오면

 텅 빈 마구간도 몽골초원이나 된 듯

 야생마의 생리도 길길이 되살아나서

 말꼬리로 우롱하고 말꼬리로 물고늘어지고

 고치기에는 늦어버린 습관으로 굳어져

 아무리 칼로 물 베기라고 하지만

 검은머리 파뿌리 되어도

 염색약 발라가며 싸우게 되잖아.

 

 

 

 

 

 

 

너무 익숙해져서 고독하다는 것도 모르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음새겼다.

 소년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북신

 

     백석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낫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가튼 모밀내가 낫다

 

 어쩐지 향산(香山)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는 농짝가튼 도야지를 잡어걸고 국수에치는 도야지고기는 돗바늘 가튼 털이 드문드문 백엿다

 나는 이 털도 안뽑은 도야지 고기를 물구럼이 바라보며

 또 털도 안뽑는 고기를 시껌언 맨모밀국수에 언저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

 

 

 

 

 

 

산수유나무의 농사

 

문태준

 

 산수유나무가 노란 꽃을 터트리고있다

 산수유나무는 그늘도 노랗다

 마음의 그늘이 옥말려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보아라

 나무는 그늘을 그냥 드리우는 게 아니다

 그늘 또한 나무의 한해 농사

 산수유나무가 그늘 농사를 짓고 있다

 꽃은 하늘에 피우지만 그늘은 땅에서 넓어진다

 산수유나무가 농부처럼 농사를 짓고 있다

 끌어모으면 벌써 노란 좁쌀 다섯 되 무게의 그늘이다

 

 

 

 

 

 

 

거미

 

          김영승

 

 월요일 저녁

 거실에 스텐드를 켜 놓고

 네모난 밥상에 앉아 글을 쓰는데

 

 베란다엔 커다란 거미

 엄지손가락 만한 왕거미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가 딱 멎어

 

 연필꽂이로 쓰는 노란 컵을 뒤집어

 펜들을 쏟고 급히

 거미를 뒤집어 씌워

 

 덮어

 

 잡았다

 

 그 밑으로 책받침을 끼워 넣어

 컵을 바쳐 든 뒤

 베란다 창문을 열고

 화단으로 던져 주었더니

 비호(飛虎)같이 기어 사라진다

 죽이기는 싫었다

 

 또 들어오면

 잡아서 기를 것이다

 

 10초도 안 되어 종료된 상황이다

 10초의 섬광(閃光)

 

 그런데

 거미 한 마리가

 불을 끄고 나갔다.

 

 

 

 

 

 

 

간잽이

 

           김윤

 

 초겨울 어느 날 싸락눈 올 때 그걸 다 소금이라고 생각해 봐

 소금 창고에 하얀 눈이 산처럼 쌓이고

 

 하염없이 우리들의 나이와 목소리가, 이별이, 공포가

 염장된다고 생각해 봐

 

 고등어 배를 가르듯 시간의 배를 쓰윽 갈라, 서툰 간잽이처럼

 내장에 소금을 확 붓지

 꿈꾸는 눈알에 듬뿍 왕소금을 뿌려넣는 것

 

 간고등어는 서서히 숙성되고 냄새를 피우며 익어가지

 우리도 조금씩 상한 채 익어가는 거야

 오래된 기차처럼 레일 위에 서서

 

 자꾸 눈은 내리고 노릇노릇 구워진 기차가 움직이고

 손마디마다 1초에 하나씩 마술꽃이 피어났지

 그 꽃들 다 어디로 갔지?

 

 마술상자 가득 소금이 철철

 누군가 철길 저 편에서 쏜살같이 그리움의 간을 잡고 있는 거야

 

 

 

 

 

 

 

11

 

      배한봉

 

 늑골 뼈와 뼈 사이에서 나뭇잎 지는 소리 들린다

 

 햇빛이 유리창을 잘라 거실 바닥에 내려놓는 정오

 

 파닥거리는 심장 아래서 누군가 휘파람 불며 낙엽을 밟고 간다

 

 늑골 뼈로 이루어진 가로수 사이 길

 

 그 사람 뒷모습이 침묵 속에서 태어난 둥근 통증 같다

 

 누군가 주먹을 내지른 듯 아픈 명치에서 파랗게 하늘이 흔들린다

 

 

 

 

 

 

 

상팔자

 

      오창렬

 

 쟁기질하는 아버지의 집에서는 개를 키우지 않았다

 밭 매는 어머니와 술 거르는 할머니와만 살았다 할머니 장에 가실 때 따라붙는 강아지 한 마리 없어

 개는 골목에서나 보고 자랐다 어슬렁어슬렁 눈만 껌벅이는, 발로 차주고 싶던, 상팔자의

 

 개를 키우고 싶어 딸아이는 몇 년을 졸랐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침대에 벌렁, 큰 대()자로

 뭔가를 탐색하는 척하다 텔레비전 리모콘은 머리맡에 던져두었나

 

 숙제하다 건너온 딸아이 몹시 피곤해하는 내 표정을 읽고는

 도움을 청하려다 만다 괜찮아요, 편히 쉬세요

 개 견()자로 누워 계세요

 

 딸아이가 개 견()자를 익히는 동안

 내 안에서 살진 나타(懶惰) 한 마리 밖으로 비져나와 개가 되었다

 

 우리 집에도 개 한 마리 산다

 철이 들어가는 딸아이의 농담 속에 비친

 집은 조금 지키고 자주 누워 있는, 눈만 껌벅이는, 그래도 딸아이가 많이 생각해 주는 팔자 좋은 개

 

 

 

 

 

 

 

우렁이새끼들

 

                 송기흥

 

 삶은 우렁이의 살을

 이쑤시개로 콕 찔러 빼 먹는데

 사각거리며 우렁이의 새끼들이 씹힌다

 이놈들이 어미 살을 파먹고

 이 세상으로 나온다는데 나와 보면

 어미는 없고 어미가 끌고 다녔던 빈 껍데기만

 횅댕그렁할 것 아닌가

 어미도 새끼를 못 보고

 새끼도 어미를 못 보는 캄캄한 생이 있다

 

 우링이들은 어쩌면 어미란 존재를 모르고

 자기들이 하늘에서 느닷없이 툭 떨어졌거나

 땅에서 불쑥 솟아올랐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리하여 부모도 형제도 모르는

 혼자만의 어떤 생을

 간단하고도 간단한 생을 간략하게 꾸려서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이 끌고 다니지는 않을까?

 

 모내기를 마친 먼 논바닥에 지금쯤

 우렁이가 지나간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삶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요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는 사상가 브뤼에르의 말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엘리엇이 시란 이해되지 않고서도 전달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한 바도 있듯이, 시에 대한 수용 과정에 해석적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아니다

 

 

 시의 해석을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정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과도한 읽어 넣기를 경계해야 한다. 작품 속에 완결된 형태의 비의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읽어 내기(reading out)를 대체하고 있는 읽어 넣기(reading into)는 작품의 비종결성을 승인하고 해석의 차원을 의미의 개방성으로 유도하려는 텍스트론적인 전략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해석은 어차피 읽어 넣기라는 극단적 견해도 등장하게 되었다.

 

 

 

 

 

 손전등을 들고 농로를 걷는다.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송곳처럼 찌르지만 어둠은 살갗조차 다치지 않는다. 어둠은 빛의 여관이다.

 

 거미의 내장에는 달빛을 소화하는 소화액이 따로 분비되고 있는 것이다.

 

 

 

 

 

 

 

   장인수

 

 일주일에 두세 번

 아버지와 통화한다

 아버지가 먼저 할 때가 많다

 일 분 정도의 통화

 형식적인 통화

 곡식 얘기,

 날씨 얘기,

 밥 얘기 하다가 끊는다

 전화를 끊을 때

 수화기 구멍에는

 아버지의 혀를 타고 온 달빛 가루가

 묻어 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크래커

 

          김지녀

 

 수백 개의 다이너마이트를 준비하고

 폭파 전문가들은 콘크리트 벽에 뚫릴 구멍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폭파 직전의 건물을 보고 있다

 날씨는 쾌청하고

 기온도 적당하다

 크래커는 바삭바삭 잘도 부서진다

 건물은 아직 그 모습 그대로 담담하게 서 있다

 이미 깊고 큰 구멍의 뼈를 가지고

 천천히 무너졌을 시간이 늙은 코끼리처럼

 도시 한복판에 머물러 있다

 까맣고 흰 얼굴들이 차례차례 지나간다

 여러 번 크고 작은 눈빛이 오고 간다

 벌컥벌컥 물 한 컵을 마시는 동안,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어버린

 벽과 창문과 바닥이

 하늘 높이 솟았다 가볍게 흩어진다

 방바닥에는 크래커 부스러기들이 잔뜩

 떨어져 있다

 저 먼지구름은 이제 곧 이곳을 통과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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