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08년 봄
또 태산은 작고 가을 하늘에 날리는 깃털은 크다고 했다. 장자에 있는 말이다.
그의 영혼이 너무 가벼운 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이 너무 무거운 게 아닐까
그래서 가스렌지 여백에는 “또 태울래?” 하고 빨간 글씨가 붙어 있는데 이 또한 아내의 처방전이다.
노랑별이
슬금슬금 맥이 빠지더니 급기야 소리 내어 앓기까지 했다 병원에서는 개홍역으로 진단했다 다 잠들었을 새벽 두 시, 강아지새끼 한 마리 등쌀에 서른두 평짜리 집의 윤곽이 문지방부터 조용히, 빼곡히 앓고 있었다 가늘고 깊은 잔금으로 앓고 있었다 녀석의 신음이 희끄무레 들숨날숨에 섞여 베란다 앞유리를 타고 캄캄한 용마산그늘까지 고스란히 기어들어가 상(傷)한 별빛처럼 묽게, 반짝였다 오래된 경첩의 별빛처럼 헛발질처럼, 자꾸만 헐겁게 삐끗거렸다
순혈(純血)황구 진돗개새끼랬다 다짜고짜 그걸 포대기에 싸들고 덤비는 아내의 철없는 소행에 혀를 찼다 아파트에 진돗개라니 더 큰 탈은 다음날부터 바로 아래턱에 단발성 경련을 일으키며 물찌똥을 지리는 거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노랑별이라 작명까지 해 준 터수에 시답잖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꼴이었다 어린 목숨이 경첩처럼 새벽녘 별빛처럼 마저 닳고 있었다 녀석이 젖심까지 가냘프게 엎질르고 있었다
힘을 놓으며 탁탁 자지러지는 서슬에도 다가가면 녀석은 어김없이 살랑살랑 꼬랑지를 내저었다 고속버스 화물칸에 실려 아스라히 알지 못하는 시간으로 찾아와서, 낯도 이름도 잘 모르는 새 주인의 손가락을 자근자근 참, 따뜻하게 깨물며 빨아대는 거였다
아파라 자근자근 참, 따뜻하게 간지럽고 아파라 고열에 감긴 채 되레 내 대신, 비장(脾臟) 속까지 앓는 녀석의 신음을 들으며, 쉰에 가까운 인환(人寰) 의 얇은 물여울, 허튼 꿈도 향내도 없는, 연필(鉛筆)로 성근 빗금이나 그으며 허기가 져라, 자근자근 참, 따뜻하게
나의 바다
내가 가출을 못하여 매양 졸리니
열일곱 살도 재미없어 하고 수학선생까지 나를 괴롭혔다
장남이라는 말에 눌린 중심은 늘 어렴풋했다
목련 필 때 공사장에서 불거진 어깨로 청춘을 받아 내리기 시작하여
배 아픈 곳, 눈 들어간 곳 내 발로 밟은 것 말고도 슬픈 게 많았다
텅 빈 소라껍질 속에 쓰러진 내 어머니, 젖은 갈매기가 파닥거려 날마다 가슴이 뛰었다
그 후 바다를 보고 살았다
감각으로 길이 나고 뚫린 바다를 하염없다 해도 열애한 적이 많다 여분도 없이 통째 통과하는 것이 좋았다 사랑했던 것 말고는 모두 멀쩡했다
어느 밤 춤, 추며 춤, 추며 자살을 기도를 했던 해안을 되돌아왔다
엄청 걸렸다는 게 견디기가 나았다
말에서 내려 생각에서 빼
흙 묻은 엉덩이만 들고 쓸쓸한 곳으로 빠졌던
아프리카, 까지 갔다
비로소 중심을 짊어지게 되었다
해안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멀리 휘어져갔다 온 다리도 일자(一字)로 말랐다
그리고는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은 내가 거둔 것이다
오물오물 파도소리를 씹는 갯바위를 보면 알 일이다
함께 살고 있는 것만 남았다
밤바다에 덜렁 벗어던진 별
사진을 찍을 때엔 대상을 향해 두어 마디밖엔 못하지만 카메라가 없을 때는 더 많은 말을 나눌 수 있습니다.
바늘귀
튿어진 단추를 달기 위해
고희를 넘긴 아내가
바늘귀에 실을 꿰달라고 한다
예닐곱 살 때 어머니의 바늘귀에
직방으로 꿰었던 그 실이
오늘 내 손끝을 달군다
어머니의 푸른 하늘을 꿰차며 날던
그 방패연과 실꾸리
아내가 내민 바늘귀에 실을 꿴다
돋보기를 쓰고도 바늘 구멍을 찾지 못해
나는 허둥댄다
갈 길을 찾지 못해
바늘귀 바깥에서 헛짚는 시간
바늘귀 하나 꿰지 못하는 나는
무엇을 잃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바늘귀가 내 앞에 절벽처럼 서 있다
노을
내가 사는 곳은 인왕산 밑이다
맑은 날 저녁 자세히 보면
인왕산은 날마다 해 하나를 잡아먹는다
해 하나를 다 삼키고 나면
그 언저리는 피처럼 붉다
저녁이 오기 전에
인왕산은 제 누운 자리에다
재빨리 검은 천을 깐다
나는 아버지•어머니를 여읜 천애고아
해가 잡아먹힌 것을
누구에게 물어볼까
내일 아침 해 하나 떠오르지 않으면
인왕산은 나를 잡아먹으러 내려올 것이다
몸살
어려서 몸살을 앓을 때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더 크려고 그러나보다.”
그런데 다 큰 내가
요즘 몸살을 한답니다
생각해보니 얼마 전
어떤 인연이 내 밭에 씨를 뿌리고 갔습니다
겨울 오후
겨울 오후 대전 버스터미널 가방 들고 지나갈 때 미친 여자가 배가 고파 그래요 천원만 줘요 손을 내밀며 말하네 난 코트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 꺼내 주며 말했지 천원 짜리가 없어요 물론 주머니엔 천원 짜리 지폐가 있었겠지 내가 이런 인간이다
북극 탐험가였던 피터 프로이첸은 그린란드에서 엄청난 눈보라 폭풍에 갇혔을 때, 이글루 주변을 맴돌며 으르렁거리는 늑대를 향해 정기적으로 그리고 최대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어떤 무기나 도구도 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늑대의 울음소리를 제압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이글루를 참호 삼아 죽음과 대결하고 있던 그에게 노래는 최후의 무기이자 주술이었던 셈이다.
*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열망한다고 말한 것은 월터 페이터였다.
“들리는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것은 더욱 아름답다”고 한 키이츠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 울음과 노래야말로 시인이 귀 기울여야 할 소리들인지 모른다.
아무도 묻지 않다
- CIPA*1
자신의 내장이 도려내지는 것을 들여다보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내 시(詩)라면 나는 전시 중인 그녀의 몸이다
중국, 장사의 박물관에 그녀의 내장은 부위별로 알코올에 담겨 불빛 아래 전시되었다 알코올홀릭, 허나 위로가 되지 않다
그녀는 제후국의 아내였던 모양이었으나 아무도 묻지 않았다
경악의 순간에 질러대는 소리는 무음이다 통증이 없다
발광 중 내지르는 고통의 뒤틀림 또한 소리가 없다
내장이 다 발라져 분리된 텅 빈 몸은 사지를 길게 뻗어 감전(感電)중이다
그녀는 제후국 승상의 사랑하는 아내였던 모양이었으나 아무도 묻지 않았다
벚꽃이 난분분히 흩날리는 봄이 수천만 번이 지났으나 썩지 않는 내장, 썩지 않는 심장, 썩지 않는 음모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았다
자신의 내장이 도려내지는 것을 들여다보며 웅얼거리는 유체이탈(幽體離脫)의 소리가 내 시(詩)라면 나는 전시 중인 그녀의 통증은 없고 입술 없이 벌어진 큰 입이다.
*CIPA: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희귀병
이러고 있는,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마애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고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분과 전체 - 하이젠베르크 (0) | 2008.04.25 |
---|---|
페이퍼 - 149호 (0) | 2008.04.23 |
내게는 이름이 없다 - 위화 (0) | 2008.04.21 |
신의 침묵 - 질베르 시누에 (0) | 2008.04.15 |
용의자 X의 헌신 - 히가시노 게이고 (0) | 2008.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