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 지식산업사, 2007(개정신판 11쇄)
“학생은 너무나 야망이 크군요. 가장 어려운 것부터 시작하였다고 해서 더 쉬운 문제가 저절로 이해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이 세계가 나아가는 길은 젊은이들이 무엇을 하고자 원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젊은이가 아름다움을 선택하면 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이고, 젊은이들이 유용한 것을 선택하면 이 세상에는 유용한 것이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결정은 자기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사회에도 큰 뜻을 갖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그렇게 쉽게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즉 다양성을 일반적인 간단한 것에 귀착시키는 일, 바로 자네가 좋아하는 그리스인식으로 말하면 ‘많은 것’을 ‘하나’에다 소급시키는 일을 우리는 ‘이해’하였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이 상이 원자의 구조를 잘 서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고전물리학의 직관적 언어로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잘 서술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 가지, 여기서의 언어는 시에서의 언어와 같이 사용될 수밖에 없음을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시에서는 언어란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청중의 의식 속에 어떤 상을 형성케 하고 그 상에 의해서 사람들 사이에 마음의 결합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원자의 내부구조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렇게 직관적 서술로써는 접근하기 어렵고, 또 우리가 이 구조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원자를 이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어는 잠시 머뭇거린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때 동시에 ‘이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개개인의 자유와 독립성이 한 공동체의 규율을 통해서 얻어지는 힘보다 더 중요합니다.
바로 이 성에 햄릿이 살았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이 성이 달리 보이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영국에서는 잘 패할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덕에 속합니다. 독일에서는 패한다는 것이 치욕에 속합니다.
발코니에 앉으면, 사람이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무한대의 일부를 포착한 것 같은 마음이 된다는 보어의 말이 자주 떠오르곤 했다.
사람이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이론에서 그때까지의 물리학이 확고한 바탕으로 삼고 있었던 동시성의 개념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많은 지도적인 물리학자나 철학자들은 동시성에 관한 종전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서 상대성이론의 격렬한 반대자가 되었던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그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세계에 들어가려면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고구조를 바꾸어야 할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받아들일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
이 단계에서 원자현상의 시공적 서술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훌륭한 물리학자에게조차 확신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또 한 번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정쯤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나는 갑자기 아인슈타인과 나눈 대화 가운데서 아인슈타인의 말, 즉 ‘이론이 비로소 사람들이 무엇을 볼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는 말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현상의 완전한 결정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결정요소들을 아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사랑하는 하나님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이 토로에서 즐겨 쓴 표현이었고, 그는 불확정성 관계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 같은 게임이 며칠간 계속된 뒤에 아인슈타인의 친구인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온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는 아인슈타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 나는 자네에 대하여 부끄러운 생각이 드네. 자네는 마치 자네의 상대성이론에 반대했던 사람들처럼 이 새로운 양자이론에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인간 공동체가 지식과 신앙의 이 같은 날카로운 분열 속에서 언제까지나 살아갈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자기 생활에서 그 가치기준에 따라 결단해야 할 때 그 영적인 형태가 자기가 속해 있는 그 사회의 모든 지식을 대신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믿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옳게 생각한다’가 아니라 ‘이 가치들에 따른 인도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얻어진 새로운 지식이 예부터 내려오는 영적인 형태를 파괴하려고 위협할 경우에는 커다란 위험이 일어나게 된다.
“만약 사람들이 정직하다면 – 특히 자연과학자들은 그래야 하지만 – 종교에서는 그야말로 아무런 정당성도 없는 터무니없는 거짓 주장만을 외치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서 아직도 종교가 무엇인가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우리를 납득시킬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죽 민중을 달래려는 욕망이 배후에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커다란 정치적 권력단체인 두 단체, 즉 국가와 교회의 동맹도 그렇게 수비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지상에서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불의에 반항하지 않고 침착하고 참을성 있게 의무를 다하는 사람에게 크게 보답하신다는 환상을 이 두 단체는 공통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종교적인 신화는 근본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여러 종교가 서로 모순된 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동양에서 태어나지 않고 유럽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아주 우연에 속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실과 무엇이 진리이며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참된 것뿐이다
신의 의지라든가, 죄와 회개, 그리고 내세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모두 거칠고 냉정한 현실을 은폐하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높은 사람의 세력에 굴복하고 복종하는 것이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 된다는 생각에 매우 유리한 뒷받침이 되었다.
그의 의견은 ‘대략적으로 진술되는 것은 분명하게 진술되어야 한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침묵을 지켜야 할 것이다’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의 종교에서 상징, 비유, 그리고 역설이 말해지고 있는 것은 종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을 파악하는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진실성이 없음을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리고 이 진실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을 나누는 일은 틀림없이 별로 쓸모가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최근 10년 동안 우리가 물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객관적’이라든가 ‘주관적’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를 배웠다는 사실을 사고의 해방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상대성원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에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티스빌데에 있는 우리 별장 근처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다 말굽자석을 때려 받는 것이었습니다. 말굽자석이 그 집에 행복을 가져온다는 민간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가 그에게 ‘너는 그렇게도 미신적이란 말이냐? 그래 말굽자석이 네 집에 정말로 행운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고 있니?’라고 물었을 때, 그는 '믿기는 무얼 믿어. 그렇지만 사람들은 믿지는 않으면서도 이런 깃이 도움이 된다는 말들을 하고 있지 않아?‘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은 이해될 수 있게끔 만들어져 잇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반대로 말을 바꿔, 우리의 사고능력은 자연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양자이론의 확장 필요성이 언급되는 까닭은 앞서 말한 것 말고도 인간의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이라는 개념이 물리학과 화학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며 양자역학에서 무엇인가 이에 매우 비슷한 것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유기체까지 포괄하는 자연과학 안에서 의식에겐 그것에 소속될 장소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의식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현상계는 연결되어 있는 조직이며, 일상적인 지각에서도 사람이 직접 보는 것과 추론하는 것과를 예리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지금 그 의자를 보고 있지만 그 후면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눈에 보이는 전면과 같은 확실성을 가지고 그 후면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이 객관적이라는 의미는 지각에 대해서가 아니라 객체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원자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는 일상경험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자란 일상경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만족하신다면 원자는 관찰 상황의 구성요소이며, 현상의 물리적 분석에서 고도의 설명가치를 가지고 있는 구성요소입니다.”
베를린의 물리화학자인 네른스트는 지구는 본디 일종의 화약고이며, 사람들이 아직 이 화약을 폭발시킬 성냥을 갖고 있지 못한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나는 오히려 우리가 때때로 언급하였던 다른 명제, 즉 어떤 일이 선한지 악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수단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해 보고 싶습니다.
‘세계는 일어난 일의 전부다’, ‘세계는 사실의 총체이지 사물의 총체가 아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나가기로 한다면, 사실을 서술하고 있기만 하면 어떤 이론도 받아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실증주의자들은 양자역학이 원자현상을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거기에 반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정치는 정치 전문가들의 직업인 것과 아울러, 우리들이 1933년과 같은 파국을 되풀이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정치는 또한 만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버너드 쇼의 어느 작품 안에서 한 주교가 “악마를 위해서 부디 페어플레이를 해 주시오”라고 말하고 있다.
‘태초에 대칭성이 있었다’ – 이것은 데모크리토스의 ‘태초에 입자가 있었다’는 명제보다 더 옳은 것이다.
예부터 터부의 논거로서 괴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 않소.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고 오로지 현인에게만 말하라.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조롱하기 때문에’라고.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지 - 33호(2008년 봄) (0) | 2008.05.06 |
---|---|
에라스무스, 사랑에 빠지다 - 페터 회 (0) | 2008.05.05 |
페이퍼 - 149호 (0) | 2008.04.23 |
시안 - 2008년 봄 (0) | 2008.04.22 |
내게는 이름이 없다 - 위화 (0) | 2008.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