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 사랑에 빠지다>, 페터 회, 청미래, 2006(초판 1쇄)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함으로써 둘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고 애쓰는 것과는 달리 그 두 사람은 서로의 차이점을 모두 다 받아들였고, 그들의 산보는 망설이는 듯 조용하게 그리고 때로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대체로 그녀는 침대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고 자기는 밤 동안에 그 섬으로 떠밀려왔다는 느낌으로 잠을 깼다.
“너는 네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안 보여.” 그녀가 말했다. “아예 있지도 않은 것 같아.”
“꼭 땅벌처럼. 그 벌은 날 수가 없다고 증명이 됐어. 하지만 땅벌은 그걸 몰라. 그래서 어쨌든 날아.”
“모든 수놈 고양잇과 동물의 페니스에는 여러 개의 미늘이 붙어 있어. 그래서 페니스가 수축할 때 그런 미늘들이 암컷의 살을 찢고, 그 고통이 배란을 촉진시키지. 그게, 그런 고통을 겪도록 하는 것이 그 동물들의 수태(受胎)와 존속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해주는 자연의 방식이야.”
차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마드렌느는 점점 더 밑으로 까부라졌다.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간 곳에서는 자기 혐오가 잠복해 있었고, 더 아래쪽에서는 시체로 채워진 지하묘지들, 즉 바깥 세상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삼가는 표현으로 숙취라고 하는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많은 동물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조니가 대답했다. “발정난 수놈 기린, 아프리카산 영양 등등. 그 짐승들은 저희들이 아프리카에 있지 않다는 의심만 들어도 죽습니다.”
마드렌느는 여자들이 섹스로 남자들을 사고, 어른들은 장난감으로 아이들을 매수하고, 아이들은 짜증이나 응석으로 양보를 얻어내는 그리고 온 집안이 돈을 써서 덴마크의 상류사회로 진입해 한자리를 차지한 집안에서 성장한 덕분으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뇌물을 주는 기술에 필요한 거장들의 테크닉을 배워왔다.
“그건 꼭 결혼 같았습니다. 바로 그거였어요. 속았다고 느낀 거지요. 왜냐하면 사실이 그랬으니까요.”
말은 우리와 같지만 아주 침착합니다. 멍청해서가 아니라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죠. 말은 어제나 내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또 일이 끝나는 시간이나 제 3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도요. 말은 지금 현재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을 보면 우리는 그놈이 느끼는 것처럼 느끼게 되죠. 그러면 아주 침착해지고 때로는…… 행복한 기분이 들기까지 합니다.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게 내가 늘 동물들을 가장 좋아했던 이유지요. 나는 항상 그 동물들만큼이나 겁이 많았습니다.”
어른들이 믿는 것과는 정반대로, 장난을 치는 아이들의 즐거움은 죽음을 모르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들의 즐거움은 어른들이 잊어버린 것, 말하자면 죽음이 아무리 강한 적수라 할지라도 무적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데에서 온다.
“나는 너희들이……. 그러니까 동물들이…… 내 말은 원숭이가 언제 어른이 되는지 모르겠어.”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자주 사람들이 언제 어른이 되는지도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아.”
“어른이란 건.” 마드렌느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자유를 얻고 난 뒤에야 될 수 있는 거야.”
“가능성 있는” 브라운(Capability Brown: 랜슬롯 브라운. 1715-1783년. 그의 별명은 장소는 가능성[capability]을 가진다고 늘 말하던 버릇에서 비롯되었음/옮긴이)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며 모든 저항을 포기했고, 죽음을 맞게 되면 그 다음에 오는 순간은 천국에서조차도 어두운 면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무렵에는 태양까지도 너무 들떠서 밤에 질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우리가 개울로 물을 마시러 내려갈 때.” 원숭이가 말했다. “가끔씩, 아니 꽤나 자주 태양이 떠올라. 우리가 찾는 게 그게 아니었는데도. 때로는 우리가 뭔가 작은 것을 찾으러 나섰을 때 뭔가 큰 것을 따라잡게 돼.”
그녀를 겁먹게 한 것은 그들의 가난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아무것도, 심지어는 등에 걸칠 옷 한 벌 없이 어떤 사회적 뒷받침도 받지 못하는 두 사람과 맞닥뜨린 일이 그녀를 두렵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사회와 사람들을 보는 새로운 견지에서 태연하게 그를 일종의 층상(層狀) 케이크, 말하자면 맨 밑바닥에는 성가신 일을 당한다는 짜증이 깔려 있고, 그 위에는 변장을 한 강도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 그 위에는 가까이 다가가도 될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맨 위에는 도시적인 정중함이라는 당의(糖衣)가 입혀져 그 모든 것을 가린 케이크로 분류했다.
상황이 사람을 실제보다 더 위대해 보이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그 원순이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우리를 잊을 겁니다. 우리가 다시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때까지 여러분에게 기억해달라고 부탁할 것이 꼭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각자에게서 여러분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어디에서 끝나고, 동물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나는.” 앤드리어 버든이 말을 이었다. “조각그림 맞추기 퍼즐을 아주 좋아했어. ‘세렝게티 사바나 위로 떠오르는 태양.’ 그건 7,000개나 되는 조각그림들로 된 퍼즐이었지. 다른 아이들은 아예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나는 일단 그 일에 빠져들었다 하면 멈추는 법이 없었어. 마침내 그 조각들이 스무 개쯤 남았을 때는 꼭 귀신에 씌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남는 건 언제나 하늘이었어. 하늘에 사실상 거의 똑 같은 3,000개 정도의 조각그림들이 들어갔으니까. 어머니는 내게 전쟁 기간에는, 그러니까 독일의 공습을 받고 있던 동안에는 사람들이 단지 하늘의 그 마지막 조각을 봐야 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했어. 그 사람들은 공습 경보를 무시한 거였지. 올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줄곧 올케가 그런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
나는 권력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고, 그래서 권력이 내 장사 밑천이라는 걸 알아.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관리할 뿐이야. 또 세상을 파괴하는 게 부자들도 아니고. 그들은 수적으로 너무 적어서 그럴 만한 힘이 없어. 세상을 삼키는 건 일반 대중들이야. 대중들의 쩨쩨한 탐욕, 하찮은 여인의 탐욕, 어린아이의 탐욕.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소시민들이 영국에 6,000만, 미국에 2억5,000만, 유럽에 7억5,000만이 있어. 우리가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서 소리를 쳐야 할 대상은, 빨리 서두르라고 재촉해야 할 대상은 그 사람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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