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33호
아프리카
비닐봉지 하나가 시꺼멓게 떴다, 비스듬히
기운다, 길쭉하게 처진 저
빈 젖, 허공을 빨다만 아이의 입가엔
쇠파리 떼가 소리도 안 나는 울음을 빤다.
상견례(相見禮)
죽은 동생 대신 상견례를 하러 간다(지금부터 나는 그다).
그가(아니 내가) 죽을 때 일곱 살이었던 딸은 이제 스물여덟이 되었다
(대견하다), 무덤 속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거기까지 따라와 피, 살, 뼈, 내장, 다 파먹던
그 들쥐, 뱀, 두더지, 구더기 새끼들
수 십 년 묵은 아카시아뿌리 같은 것들……
그녀(아니 나의 딸)가 살포시 내 옆에 앉는다 (낯설다).
나는 생전(生前) 한번 스친 적도 없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몸도 마음도 없이
네, 네, 그렇시죠, 그렇습니다. 뇌며
근엄하게, 덜 익힌 고기를 씹는다.
자세히 보니
그들도 어느 무덤에서 막나왔는지 뻣뻣이 몸이 굳어 있다
당신들은 언제 죽었소? 지, 지금 어느 무덤에 계시오?
나는 불쑥 그들에게 묻고 싶은 걸 꾹 참는다.
조금 늦게 도착한 신랑이 미안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사람들, 피 묻은 입술을 네프킨으로 문지르며 바라본다 .
뭘로 드시겠습니까?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며 묻는다.
미디움으로 익혀……
…… 조용하다
칼로 고기 써는 소리, 접시에 부딪는 포크소리만 간간히
새소리처럼 들리는
이 지하 1층
먼지는 왜 물에 끌리는가
낮아지는 수면,
연못 근방 벤치에서 바삭거리는
잠자리 날개를 집어 들었지.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세로
한참동안 절하던 잠자리였지. 그동안
나는 나일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지.
그걸 잊고 살았지. 잠자리 날개가 움찔할 때마다
내 몸으로 떨림이 증폭되어 퍼졌지.
이제는 오지 않아도 될 애인을 기다렸지.
오래 전에 요절한 추억을 기다렸지. 먼지들이
더러운 물에 끌려가는 여름 한낮, 그늘이었지.
나이테
아- 먹어도 배가 고팠다
허리띠를 졸라 맸다
졸라맨 허리띠를
풀 수가 없었다
먼저 찬 허리띠는
안으로 들어가고
또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플 때마다
허리띠를 둘러찬
통나무를 본 적이 있었다.
신록
유월은 똥도 푸르다
뽕잎 먹은 누에 똥.
그늘 집
유종인
풋눈이 왔으니 어쩌겠는가
이름은 있고 몸은 없으니
어디를 짚어야 그 맘이 서린 몸을 만지겠는가
겨우 겨우 살얼음 낀 호숫가 갈대밭 수렁에 들어앉은 어제의 눈들이
오늘은 들고양이 짧은 회목에라도 묻어갈 곳이 그늘이라면
눈은 내렸으나 비가 왔는가보다 질척이는 발자국을 남기며
눈이 어둔 노부부가 끌고 가는 그림자만 번들거린다
들판에 나뒹구는 찌그러진 냄비 안쪽에도 그늘이 지고
그 안에 몸을 도시란 풋눈 일가(一家)도
된바람 한 번이면
그늘의 방향이 바뀌며 멸문(滅門)으로 갈 터인데
너무 빨리 갔다는 말이 축축해졌다 마르는 사이,
상수리나무 숲가 한 바위 그늘만 든든해서
거기 든 풋눈들만 집 밖을 못 나서도 좋단다
먹먹한 그늘도 군식구를 들여 새하얗단다
귀가
강남역 사거리,
꼬리를 물고 서 있는 차량 틈 사이로
오토바이 한 대
조문을 배달하러 간다
헬멧도 없이 꽁무니에 매달린
3단 근조화한
누군가 황급히 조문을 간다
목 움츠린 오토바이 사내도
바람의 등에 얼굴 묻은 국화꽃도
깍지 낀 제 손만이 안전벨트다
지금 누가 안전벨트를 풀고
돌아가고 있나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돌아가고 있나
미리 가 불 지필 수는 없어도
머문 자리 깨끗이 닦아 주고 싶은 밤
어머니,
가신지 십 수 년이 지나도
잠시도 마음 떠나신 적 없는 어머니,
손수 찍어 두신 영정사진 속에서는
누덕누덕 기워 놓은 생의 옷자락도
곱게 접어놓고 가신
내 어머니
보름달
신용목
어둠을 길러
하늘로 올려보낸 두레박
줄 끊어진
두레박,
재개발지구 깨진 지붕에
엎어져 둥둥 뜬 두레박
어둠이 튀어오르는
두레박
혼자 사는 할머니가
마시는 두레박, 엄마
없는 아이들이
손 담그고 노는
두레박
붉은 가위표 담벽마다
어둠의 해골해골들,
첨벙대는 두레박
맵고 아린
강정이
1
호두까기인형이 되어
태엽감은듯 빙글빙글 도는 발레리나
새처럼 춤추기 위해 발가락은
맵고 아리다
그녀 발가락이 불퉁불퉁
마늘뿌리다
꽃목걸이 걸고 웃는 발레리나
껍질 벗긴 한 톨 마늘이다
스포트라이트 받은 얼굴 매운내 훅~ 터지니
눈 부 시 다
2
친구야 마늘은
장터국밥에나 용봉탕에나
헌 운동화나 동쪽 별자리에도
들어있다
울지마라
그래, 생각이 에너지다
아무리 파도 기름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지구 반대편을 팠다.
생각이 에너지다.
SK에너지
아무리 해도 사람들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텔레비전 반대편을 보았다.
맞다, 생각이 에너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지구를 그만 파야 한다.
그만 파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이 에너지라는 생각이 팠던
지구의 저 수많은 구멍들부터 막아야 한다.
지금 지구 반대편으로 달려가
구멍을 뚫고 기름을 뽑아 올리는 생각은
새로운 에너지가 아니다.
지구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아무리 해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 든다?
지구가 곧 내 몸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그럼 그때 자기 몸의 반대편을 파 보라.
그때 자기 마음의 안쪽을 보라.
먹고 입고 쓰고 타고 버리는 것의 앞뒤를 보라.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고
그것은 또 어떻게 어디로 가는가.
그렇다면?
그런 생각이 새로운 에너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새로운 생각도 못 된다.
겨울 백곡에 갔다
영하의 날씨가
쾅쾅 대못을 치고 있었다
물도 한번쯤 저렇게 문을 내다 거는구나
- <겨울 백곡> 부분
가을도 늙는구나
잎새마다 촘촘한 주름만 남아
허연 분이 내리는 단풍나무
꼬들꼬들해진 생각을 매단
허공도 낡아간다
- <공림사, 가을> 부분
자화상
고작 1m 쇠사슬에 묶여
저 불길 속을 탈출할 수 없었던 말인가
산불 화마가 지나간
아침 한나절
뚝딱 비우고 간 임자없는 개밥 그릇 하나
덩그라니,
비로소 자유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씨네21 - 652호 (0) | 2008.05.15 |
---|---|
페이퍼 150호 (0) | 2008.05.07 |
에라스무스, 사랑에 빠지다 - 페터 회 (0) | 2008.05.05 |
부분과 전체 - 하이젠베르크 (0) | 2008.04.25 |
페이퍼 - 149호 (0) | 2008.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