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1, 파스칼 메르시어, 들녘, 2008(초판 6쇄)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비행기에 올라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한다는 사실 – 그 중간에 놓인 개별적인 모습들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 – 은 그레고리우스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레고리우스는 크게 소리 내어 이렇게 말해 보았다. 이 말은 옳았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이렇듯 옳고 의미 있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화기에 대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허하면서도 장엄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인생의 뼈대를 만든 도시에서 도망 중이었고, 15년 동안 살았던 집에서 몸을 숨겨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 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범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청소를 해서 번 돈이 얼마인지 적어두던 그 노트는, 고문을 가하는 도깨비불처럼 늘 새롭게 떠올랐다.
“한 번만 바다를 더 보면 좋겠구나. 하지만 우리 형편에 그건 안 되겠지.” 돌아가시기 6개월 전, 죽음을 예감한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세상에 어느 은행이 우리에게 대출을 해주겠소.” 아버지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더구나 그런 일에.”
그레고리우스는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그는 말이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거나 멈추게 하는지, 어떻게 울거나 웃게 할 수 있는지 어릴 때부터 늘 궁금했다. 이런 의문은 어른이 된 뒤에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학교로 다시 찾아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과거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나 미래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던, 그 순간의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의사는 마치 새로운 풍경에 익숙해지려는 사람처럼 아주 세밀하게 검사했다.
“책이야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잖아!” 친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넌 여기서 아주 많은 것을 놓쳤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 책들은 다른 곳이 아닌 여기에 있잖아.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이제 너도 책 속으로 도망치는구나.” 독서의 기쁨을 발견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내 자신이 나에게 방해가 되어 성가셨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외모에서 스스로를 알아채지 못할까? 그들에게도 자신의 영상이 천박한 왜곡으로 가득 차 있는 무대처럼 생각될까?
그가 학교에 다닐 때 척추경직증을 앓던 교사가 있었다.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땅바닥을 계속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목 뒤로 젖히는 습관이 있었다.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의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간을 던진다.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오빠가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파치마가 죽고 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였어요. ‘내부의 마비를 막기 위한 싸움이다.’ 오빠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 잔은 반만 채워야 하는데.”
낮게 잠긴 목소리로 에사가 말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 뒤에도 이 말을 잊지 못했다. 눈물이 날 듯 눈이 따가웠다. 그는 학대받은 이 노인과 자신의 관계에서 영원히 기억될 행동을 했다. 에사의 찻잔을 들고 뜨거운 차를 반이나 마신 것이다.
저항운동가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꿈꾸는 사람의 감수성 예민한 영혼이 아니라 나처럼 투박한 두개골이 필요하지…
신은 자신이 들 수 없는 돌덩이를 창조할 수 있을까? 만들 수 없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제 들 수 없는 돌덩이가 생겼으니까.
프라두는 다양한 정적(靜寂)을 구별하여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귀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만 있었다.
“그레고리우스, 그건 글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말하는 건 글이 아니라고요. 그냥 말을 하는 거예요.” 독시아데스가 그레고리우스에게 이 말을 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사람들이 서로 연관이 없고 모순된 말을 한다고, 그리고 말한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고 불평했을 때 한 대답이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면, 그럼 말로는 도대체 뭘 해야 하느냐고 그레고리우스가 물었다. 독시아데스는 껄걸 웃었다.
“스스로 말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지요! 그래서 말이 계속 이어지도록.”
‘아마데우가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에는 더 이상 글씨가 들어있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데우는 책의 의미만 삼키는 게 아니라 잉크까지 먹는다니까요.’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장례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죠. 죽은 사람과는 관계가 없는……’
정신은 스스로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스스로에게 더 이상 놀라지 않는 인식의 친근함을 우리에게 그럴듯하게 꾸며대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단어들로 엮여 있는 자기기만의 매력적인 활동 무대다.
그를 그로 만들었던 내부의 중력은 프라두에게 이런 결론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도 가끔 카페에 앉아 신문을 읽을 때가 있잖아요.” 그가 플로렌스에게 글을 읽을 때는 세상의 소음을 차단해줄 보호벽이 필요하다고, 가장 좋은 벽은 두껍고 단단한 지하 문서실의 벽이라고 말하자 그녀가 한 말이었다. 아, 신문? 그가 말했다. 난 글을 말한 거였어.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사람들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스스로를 견디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될 테니까.
“… 난 언제나 이른바 ‘성숙’이라는 걸 거부하던 사람이오. 싫어해. 난 사람들이 말하는 성숙이란 걸 낙관주의나 완벽한 권태라고 생각하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우린 실망을 찾고 추적하며 수집해야 한다.
부모님에 대한 실망을 평생 동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사람들에게서 우린 뭘 기대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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