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문학과지성사, 2006(3)

 

 

 

 

 

 

양철 지붕과 봄비

 

 붉은 양철 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개진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 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 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

 

 

 

 

 

 

아이와 망초

 

 길을 가던 아이가 허리를 굽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돌이 사라진 자리는 젖고

 돌 없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날개를

 몸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아이의 손에 멈춘 돌은

 잠시 혼자 빛났다

 아이가 몇 걸음 가다

 돌을 길가에 버렸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강과 강물

 

 강에는 강물이 흐르고 하늘은

 제 몸에 붙어 있던 새들을 모두 떼어내고

 다시 온전히 하늘로 돌아와 있고

 둑에는 풀들이 몸을 말리며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강가에서는 흐르지 않고 한 여자가 서서

 안고 있는 아이에게 한쪽 젖을 맡기고

 강이 만든 길을 더듬고 있다

 아이는 한 손으로 젖을 움켜쥐고

 넓은 들에서 하늘로 무너지는

 강을 본다

 강에는 강물이 흐르고

 물속에서 날개가 젖지 않는

 새 그림자가 강을 건너가고 있다

 

 

 

 

 

 

 

 

유리창과 빗방울

 

 빗방울 하나가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순간 유리창에 잔뜩 붙어 있던 적막이 한꺼번에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빗방울이 이번에는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여섯 이렇게 왁자하게 달라붙었습니다

 

 한동안 빗방울은 그러고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유리창에는 빗방울 위에까지 다시 적막이 잔뜩 달라 붙었습니다

 

 유리창은 그러나 여전히 하얗게 반짝였습니다

 

 빗방울 하나가 다시 적막을 한 군데 뜯어내고 유리창에 척 달라붙었습니다

 

 

 

 

 

 

 

새와 나무

 

 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발자국과 깊이

 

 어제는 펑펑 흰 눈이 내려 눈부셨고

 오늘은 여전히 하얗게 쌓여 있어 눈부시다

 뜰에서는 박새 한 마리가

 자기가 찍은 발자국의 깊이를

 보고 있다

 깊이를 보고 있는 박새가

 깊이보다 먼저 눈부시다

 기다렸다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던

 박새 한 마리 눈 위에 붙어 있는

 자기의 그림자를 뜯어내고 몸에 뭍이고

 불쑥 날아오른다 그리고

 허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지워버린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허공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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