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 2008여름(30)

 

 

 

 

 

 

늙은 산벚나무

 

                송찬호

 

앞으로 늙은 곰은 동면에서 깨어나도 동굴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는기라

동굴에서 발톱이나 깎으며 뒹굴다가

여생을 마치기로 했는기라

 

그런데 또 몸이 근질거리는기라

등이며 어깨며 발긋발긋해지는기라

그때 문득 등 비비며 놀던 산벚나무가 생각나는기라

 

그때 그게 우리 눈에 딱, 걸렸는기라

서로 가려운 곳 긁어주고 등 비비며 놀다 들킨 것이 부끄러운지

곰은 산벚나무 뒤로 숨고 산벚나무는 곰 뒤로 숨어

그 풍경이 산벚나무인지 곰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산행을 멈추고 바라보았는기라

중동이 썩어 꺾인 늙은 산벚나무가

곰 발바닥처럼 뭉특하게 남아있는 가지에 꽃을 피워

우리 앞에 내미는기라

 

 

 

 

 

 

 

박하사탕

 

           신현정

 

왜 박하사탕은 새 가슴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너의 입 안에 환한 마름모꼴 한 개를 넣어 주었다

 

애야, , 아슬한 벼랑, 오오래 녹여 먹어라.

 

 

 

 

 

 

소망은 온전하다

 

               신현정

 

 나도 내 자전거가 있었으면 하는 것으로

 

 그러면 자전거를 아주 잘 탔을텐데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 아버지를 지나 나를 지나 비로서 우리 애한테 가서 이루어졌는데

 

 그 참 이제라도 이루어지는 소망, 소망아 고맙다

 

 내가 봐도 우리 애, 자전거를 참 잘 탄다

 

 어쩌면 바람이 내준 자리가 아닌가 하였으며

 

 바람이 내다르는 것 같았으며

 

 수양버들 휙휙 늘어진, 저수물 찰랑거리는 뚝방길을 달리는데

 

 바람이 바람을 가르는 것이었으며

 

새소리가 났으며

 

 바퀴살은 햇살을 훼살지으며 돌았으며

 

 소망은 아직도 새 것인양 반짝거렸으니 소망아 고맙다

 

 허참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더니만

 

 타라고 해서 얼떨결에 그만 손바닥만한 짐칸에 올라 타고 말았는데

 

 이놈 보게 처음에는 핸들에서 한 손을 떼어 놓더니

 

 어렵쇼 양손 다 놓아버리고 냅다 달리니

 

내 등 뒤에선 잠바가 바람이 하나가득

 

아 내 소망은 온전하였다.

 

 

 

 

 

 

 

 

치약

 

             고영민

 

 한번 짠 치약은 다시 넣을 수 없다

 

 한번 짠 치약은 다시 넣을 수 없다

 

 어린 시절 군것질 거리가 없어 봄 햇살 번지는 담장 밑에 앉아 몰래 치약을 먹은 적이 있다 손끝에 조금 짜서 먹었더니 입안이 화하고 참 달달했다 조금 더 짜서 먹고 조금 더 짜서 먹다보니 나중엔 치약 한 통을 거의 다 먹어버렸다

 

 저녁 무렵, 아버지가 내 뒷꼭지에 슬쩍 한마디를 흘린다

 큰일 났네 누가 그 독한 치약을 한 통 다 먹었나봐, 그걸 한꺼번에 먹으면 멀쩡한 어른들도 성치 않지, 누군지 모르겠는데 오늘 중으로 물 세 바가지는 먹어야 죽지 않을 텐데 말야

 

 뒤척뒤척 나는 잠을 못 이루다가 식구들이 자는 틈을 타 몰래 부엌에 나가 바가지에 물을 떠 마시고, 갑자기 방안에서 너 오밤중에 부엌에서 뭐 하냐?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바가지에 얼굴을 박고 꿀꺽꿀꺽 남은 물을 마시는데

 

 어느덧 나도 그 당시 아버지의 나이,

 치약처럼 짜인 아버지는 영영 이 세상에 없고

 이 한밤중 나는 무슨 이유로 빈 부엌에 나가 꿀꺽꿀꺽 세 바가지의 물을 혼자 마시고 있나

 

 

 

 

 

 

 

 

최훈희

 

             차승호

 

 콩밭 매나 운동이나 매한가지 아니라니?

 지난 달 코골이 심하여 병원에 갔다 덜컥 갑상선 수술 받은 어머니 콩밭 매는 건 운동이 안 된다는 처방에 따라 저녁 자시면 나서는 산책길, 따라나섰네

 콩밭 매는 건 노동이라고 허년규

 노동이 무슨, 얼절이나 겉절이나 썩어 �어질 움쩍거리는 거 아닌감? 산책도 들판 둘러보는 일로 여기시는가 농로 따라 억세게 뻗은 껄껄이풀 걷어 내시네

 공부 많이 헌 의사양반 운동 운동 허니께 그냥 그런개비다 허넌겨

 농사꾼 발자국 소리 표가 나는지 문풍지처럼 바람귀 세우는 들판 무량수들판

 들판은 어머니(최순희, 1942~ )가 다 키우시너먼그류 낮에는 노동으로 밤에는 운동으로 어머닌 무슨 노동운동가 같유, 말허자면 실존노동운동가

 들판 깊은 어디쯤 뜸부기 울음 잦아드네 내게 몇 번이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즐거운 시간 하나 저물어 가네

 아직 살어 있으니 실존은 실존이구먼그랴

 

 

 

 

 

 

 

 

 

북경엽서

 

           최진화

 

열여섯 아들의 첫사랑이

홍역처럼 지나가고

붉은 열꽃이 뜨거워

집게에 물린 듯

내 마음도 잠시 정전되었다

 

네 넓적한 손에 내 손을 얹고

우리는 겨울이 가까운 북경으로 갔다

내 몸이 쏘옥 안길 만큼 커 버린 남자여

어떻게 내 속에서 이런 네가 나왔니

 

안개로 시작하는 북경의 아침

붉은 자금성 하늘 위로 겨울 철새들 날아간다

사랑에 가슴 베인 남자여

솟구친 처마 한 끝에 그 마음 걸어두자

몇 십 번 저 철새 오고 간 후

비바람 견디어 새 살 뽀얗게 돋아 있을지

다시 와 만져보자

 

내 처녀막을 뚫고 들어와

사랑한다는, 살고 싶다는 기쁨을 가르쳐 준

최초의 남자여

네 마음 걸린 처마 옆에 그 옛날 걸어둔

한 여자의 마음

다시 붉게 펄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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