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TB가 왜 가장 마지막인가?
이런 일이 있었다.
싱가폴 맥켄에서 하는 윈저 경쟁PT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아이디어도 다 정해지고 인쇄 시안까지 다 만들어졌다.
그 인쇄 시안에 들어가는 카피까지 다 끝난 상태였다.
만들어놓고 사장님과 이사님을 모시고 리뷰를 하였는데
뭔가 부족한 게 눈에 띄었는가 보다.
그래서 수정사항이 내려왔다.
이 아이디어와 상황을 뒷받침하는 RTB가 들어간 카피를 추가로 집어넣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디어를 성립하게 하는 RTB는 뭐였을까?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브랜드 material을 다시 살펴본 뒤, 하루가 지나
기획에서 RTB 2가지를 주었다.
그러니까 광고 creative 최종 단계에서 새삼 이 안을 성립하게 하는 RTB를 찾아
꿰어 맞추는 것이다.
대홍기획에 있었던 때를 생각하며 맥켄과 비교해보면
두 대행사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이런 부분이다.
대홍기획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흔들리지 않는 징검다리를 놓고
최종 creative까지 진행되도록 한다. 따라서 RTB라는 묵직한 돌 하나가 놓이기 전에
다음 발을 내밀지 않는 것이다.
반면, 맥켄에서는 징검다리를 놓기도 전에 점프!(또는 비행)를 한다.
그래서 날기도 하고 헤엄도 치다가 여기야!하고 최종 발을 디딘 지점에서
뒤돌아 거꾸로 징검다리를 놓아 길이 되도록 만드는 때가 종종 있다.
좋은 점은 creative의 영역이 보다 넓고 자유롭다는 것이고,
단점은 이런 일들(RTB카피를 맨 마지막에 논리가 성립되도록 우겨 넣는)을
몇 번이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들은 얘기 중 일부를 멋대로 각색해보면,
TBWA의 스타일이 맥켄과 비슷한 점이 있지 않나 싶다.
끝장나는 visual Idea 하나가 있으면 그걸 카피라이터가 ‘논리’를 만들어 준단다.
그렇게 보면 또 대홍기획과 비슷한 곳이 제일기획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좀 더 파격적이고 creative한 아이디어를 내려고 하면
지금 발이 어딨어? 발이? 하면서
먼저 성급히 달려가지 말고 한 발 한 발, 징검다리 놓는 데로 따라가다가
최종 가이드 안에 꼭 들어가는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곳 아닌가?
그저 주워들은 얘기들일 뿐이다.
어디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대홍기획 같은 곳이 카피라이터가 일하기는 좀 더 편하고
맥켄 같은 곳이 카피라이터가 일하기는 좀 더 불편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굳이 회사라는 큰 무리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전형적인 카피출신 CD가 있는 팀의 아트 팀원이나
전형적인 아트출신 CD가 있는 팀의 카피 팀원이나
겪게 되는 일인 것 같다.
서로가 서로의 일하는 스타일을 답답해 하는 것이다.
방법은 있다.
우선 ‘전형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전형적인 카피나 전형적인 아트가 되지 말고 아트를 생각하는 카피와
카피를 생각하는 아트가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카피 신입을 아트 선배가 가르치고, 아트 신입을 카피 선배가 가르치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서로 상대방이 어떤 점에서 내 능력을 필요로 하고, 카피가 어떤 식일 때 아트가 힘들어하는 지를 알게 된다면 말이다. 사실 카피라이터가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카피라이터 보다는, 아트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카피라이터가 더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른 방법은, 문제의 발생자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논리가 질겨지기 전에 성급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그것을 관철시킨 사람이
그에 맞는 논리/카피를 디테일하게 짜맞추고,
또 옴짝달싹 못하게 좁은 방향의 가이드를 둘러 쳐놓고 뛰어난 creative를 원하는 사람은
직접 그 가이드 안에서 아이디어를 내어 스스로를 만족시키게 하는 것이다.
나는 다행히 전형적인 카피는 아닌 것 같고, 또 아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끔 전형적인 카피 CD와 일할 때가 오히려 곤혹스럽고 아트CD가 편할 때도 많다.
(얼마 안 되는 경력이지만 그 사이 4명의 CD와 팀을 이루었었다)
아무튼 이렇든 저렇든
그 RTB가 들어간 카피를 쓰긴 쓰는데 이거 꽤 어렵다.
그 이유는 아이디어 자체가 지금 이 RTB에 의지해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라
다른 RTB에서 나온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History라는 RTB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지금 어쩌다 보니
Blending라는 RTB가 있어야 이해가 되는 아이디어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컨셉과 슬로건에는 History가 중심이고…
그러다 보니 History와 Blending을 어떻게 엮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보면 심플한 맛이 떨어지고 복잡해지고...
그러고 보면, 광고가 건설이 아니라 다행이다.
붕괴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누가 만약 내 집을 짓는데,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하셨죠?
라고 물으니 그때 그에 적당한 이유를 찾아서 말해주는 건
마음이 편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마찬가지로, 광고를 집 짓듯이 하려는 사람도 답답한 노릇이겠지.
다들 이유가 있고, 다들 옳으며, 또 다들 바쁘니까,
아무튼 지금 궁금한 건 단 하나.
왜 RTB가 맨 마지막이지?
내가 퇴근 못하는 이유가 왜 하필 RTB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