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다음주 토요일까지 휴가다.
여행을 떠날 것이다.
누가 물으면 할 수 없이 '일본으로 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 내가 생각하는 답은 그게 아니다.
"나는 여행을 떠날 것이다. 한국이 아닌 곳으로."
가, 내가 생각하는 이번 여행에 더 적합한 표현이다.
나는 가끔씩 대화하기가 막막하고 답답해지고는 하는데
이처럼 솔직하게 대답할 경우 대화가 잘 안 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나 여행 가, 한국이 아닌 데로."
가 이번 여행의 목적과 마음가짐에 가장 적합한 표현인데
실제로는 "일본으로 여행가", 라고 말해줘야 상대방이 편하게 받아들일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 가서 배를 16시간 정도 타고 오사카로 가는 건 그러므로
나의 여행 계획에 가장 적합한 코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배 타고 16시간 걸려 오사카 간다는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뭐하러 그렇게 하느냐고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반응이며
뉘앙스로 파악하기는 '어리석은 짓'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배 타고 간다고 딱히 많이 싸지도 않네. 라는 대답.
16시간이면 차라리 일본에 빨리 가서 그만큼 더 보겠다(놀겠다). 라는 대답.
을 보면 이들이 생각하는 여행은 "000에 가서 000을 보고 즐기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여행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나의 행위가 답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 여행은 '한국이 아닌 곳으로 가는 것'이지
어디 가서 뭘 보거나 뭘 먹거나 뭘 사진 찍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행의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가고 오는 중에 32시간 가량을 바다 한 가운데 있을 것이다.
나는 바다를 여행 할 것이다.
일본의 도쿄타워나 오사카 성이나 교토의 유적지가 보고 싶을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나는 새벽녁에 바다 한 가운데 떠있고 싶다.
새벽녁 위는 하늘 밖에 없고, 사방은 바다 밖에 없는 곳에서 지구를 감상하는 것에 비교하면
도쿄타워 따위는 모니터 상의 픽셀 한 조각만큼의 흥미 밖에 끌지 못한다.
파리에 갔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에펠탑은 이미지로 보던 것과 비슷했고 별 감흥 없었고, 손때가 너무 많이 묻어있었다.
파리에서 가장 가슴 벅찼던 풍경은, 파리 변두리 일반인들 거주 구역에 있는
평범한 놀이터에 해질녘 동네 꼬마들이 놀고 있으면 엄마나 아빠가
데리로 오는 풍경이었다.
그렇게 누군가가 아이들을 하나씩 다 데리고 가니 놀이터엔 나 혼자만이 남았고
저녁 9시가 되자 경비원들이 와서 놀이터 문을 잠가버렸다.
혼자 남게 되고, 경비원이 가라고 내보내는 데 갈 데가 없었을 때
느꼈다.
아, 내가 여행중이구나.
내가 생각하는 여행이란, 불을 탁 꺼버리는 것이다.
형광등은 셀 수 없이 많은 빛의 파장들을 내보낸다.
핸드폰, 친구들, 한국말, 일상, 서울, 회사, 한국음식, 컴퓨터, 카메라, 이런 것들이
빛을 구성하는 파장들이다.
우리는 이 파장 속에서 사물을 구별하며 활동을 하고 일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여행이란
집을 나서면 불을 탁, 꺼버리듯이
이 모든 것을 탁, 꺼버리는 행위이다.
그러고나면 뭐가 어떻게 될지 알겠는가?
당연히 모른다. 나는 그대로이지만, 심지어 내 주변도 그대로이지만,
불을 끄는 행위로 인해 나는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꽃무늬 그릇은 더이상 꽃무늬 그릇이 아니고,
빛이 비추던 환경에 맞게 적응되어 있던 내 삶은 일순간 마비가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던 감각들과 사고의 유형,
내가 모르고 있던 나의 용기나 약한 모습, 두려움, 재치,
그리고 발견되지 않았던 버릇들과, 눈치 채지 못했던 편견들,
때가 묻은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게 내 여행이다.
나는 정말 가끔씩은 몇몇 친구와 여행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그 같은 깨어있으려는 의지를 쉽게 비웃는다.
왜 혼자가? 심심하게? 라는 질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