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안도현, 창비, 2007(초판 11)

 

 

 

 

 

 

 

 

간격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鬱鬱蒼蒼)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보고서야 알았다

 

 

 

 

 

 

 

 

 

 

 

 

 

 

곰장어 굽는 저녁

 

 

수족관 속 곰장어는 슬퍼서 몸이 길구나

물속을 얼마나 후려치며 싸돌아다녔기에

이렇게 길쭉해졌다는 말이냐

일생(一生)이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그 길이 몇뼘 늘리는 일이었구나

 

그러나 생()을 벗기는 일 또한

가만히 보니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물살이 온몸을 훑으며 지나가듯

껍질은 단숨에 벗겨진다

 

평생 몸에 두르고 살던 껍질은 거추장스러웠으나

껍질 벗긴 다음에 드러난 알몸은 외려

부끄러운 것, 그리하여 퍼덕퍼덕 몸을 떨다가

곰장어는 자신을 선선히 도마 위에 눕혔을 것이다

 

간장과 고추장을 몸에 바르고 지금

곰장어는 숯불 위에 올린 석쇠에 누워 있다

더는 꼬리로 바다를 후려칠 필요가 없고

다시는 뜨거운 불 위를 헤엄쳐 갈 일 없는 몸이

발긋발긋 익어가고 있다

 

하늘로 기어오르려나

포장마차 밖에는 눈보라의 긴 꼬리가

세상 속에다 구멍을 내는 저녁

 

 

 

 

 

 

복숭아

 

 

, 하고 입을 꼭 다문 복숭아를

, 하고 입을 벌려 깨물었는데

갑자기 내 입속의 마른논으로

물 들어오네

 

복숭아를 먹는다는 것은

남의 살 안쪽을 베어먹는 참으로 허망한 일,

한 몸이 또 한 몸을 먹는 일인데

 

어쩌다 외국 나갔다가 대한항공 타고 돌아올 때

착륙 직전에 내려다보이던 숲속의 무덤들, 그 둘레가

()이 한입씩 깨물어놓은 둥근 이빨자국 같았지

 

, 하고 입을 꼭 다물고 사는 사이

, 하고 입을 벌려 신이 한 생애를 깨물었나

어디서 문득 부고(訃告)가 오네

 

젖은 눈으로 울다가

복숭아씨처럼 남은 복숭아 가족들을

위로하러 가야지

 

 

 

 

 

 

 

 

 

 

 

꽃 지는 날

 

 

 뜰 안에 석류꽃이 마구 뚝뚝 지는 날, 떨어진 꽃이 아까워 몇개 주워 들었더니 꽃이 그냥 지는 줄 아나? 지는 꽃이 있어야 피는 꽃도 있는 게지 지는 꽃 때문에 석류 알이 굵어지는 거 모르나? 어머니, 어머니, 지는 꽃 어머니가 나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시고, 그나저나 너는 돈 벌 생각은 않고 꽃 지는 거만 하루종일 바라보나? 어머니, 꽃 지는 날은 꽃 바라보는 게 돈 버는 거지요 석류알만한 불알 두 쪽 차고앉아 나, 건들거리고

 

 

 

 

 

 

돌아누운 저수지

 

 

둑에서 삼겹살을 굽던 시절은 갔네

물 위로 일없이 돌을 던지던 밤도 갔네

저수지 그 한쪽 끝을 잡으려고 헤엄치던 날들도 갔네

청둥오리떼처럼 몇번 이사를 하고

청둥오리떼처럼 또 저수지를 찾아왔네

저렇게 저수지가 꽝꽝 얼어있는 것은

얼어서 얼음장을 몇자나 둘러쓰고 있는 것은

자기 속을 보여주기 싫어서

등을 돌리고 있는 거라 생각하네

좀더 일찍 오고 싶었다고

등을 툭 치며 말을 걸고 싶지만

저수지가 크게 크게 울 것 같아서

나는 돌 하나 던지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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