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2007 겨울

 

 

 

 

 

 

 

 

내 이름은 문학의 밤

 

             상국

 

내 이름은 문학의 밤입니다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 친구들 모임에 가서

누군가 어이 문학의 밤 한 잔 받아 하면

나는 미친놈들 하면서도 덥석 잔을 받습니다

 

내 앨범 속에는 유난히 밤이 많습니다

별이 빛났거나 눈보라 치던 밤 혹은

너 아니면 죽고 못 살던 밤

그리고 시체 같은 밤도 있었으나

나는 그냥 어둑한 길을 혼자 걷는 밤이 좋았고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문학의 밤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부지런해도

문학의 아침이나 문학의 저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문학은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문학의 밤문학은 밤과 같은 말이어서

나의 시는 대체적으로 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차마 잊지 못할 밤이 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밤이 있게 마련입니다

나라고 왜 그런 밤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밤들이 물결처럼 왔다가는 스러져가고

나에게는 문학의 밤만 남았는데

아직도 그 어둑한 길을 혼자 다닌다고

친구들은 일부러 즐거운 술잔을 건네는 것입니다

내 이름은 문학의 밤입니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꽃게는

어찌 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끝으로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크리스마스 이브

 

강정이

 

밤 한 시 엘리베이터를 타니

덮치는 술내

벚꽃처럼 나부낀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와 나 어긋난 길 허덕이나 부딪힌

순간 뺨에 닿았던 술내

그 남자의 입김이다

이럴 수가

나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렸단 말인가

빈자리 가득 술내 아직 펄펄하니 방금 내렸나 보다

어디로 떠났을까

지금은 밤 한 시

길바닥은 새근새근 눈()이불 덮고 있는데

텅 빈 바닷가 검게 웅크린

물수리같던 남자

먼 하늘 바라볼 땐 지바고같던 남자

라라의 머플러를 선물하던 남자

나 아직 길 헤매고 그 이미 내려버린

22층 버튼을 누르는 사이

삼십 년이 팔짱을 낀다

 

어디선가 캐럴이 울린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기린과 나

 

         김지녀

 

 순간, 기린의 눈과 마주친다

 큰 나무의 나뭇잎을 절반쯤 뜯어 먹은 기린 앞에서 나는 벌써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비웠다

 땡볕에서 눕지도 않지도 못하는 기린을 보며

 나는 기린의 목이 참 길다는 생각을 하다가 내 배가 참 부르다고 생각한다

 

 화면에 내 얼굴이 비친다 금방 기린의 얼룩무늬에 잡혀 사라진다 사르르 배가 아프다 동시에,

 까맣고 큰 눈동자로 기린이 나를 보며 씹는다 계속

 

 껌벅이는 눈, 기린이 긴 혀로 날름거리며 나를 핥고 있다 나는 콧등에서 발등까지 순식간에 흐물거리다 녹아내린다

 이것은 적도가 내 몸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

 한차례 소나기 후, 오후가 끈적해졌기 때문

 

 날마다 목이 마른 건 기린이 아니야

 기린의 참을성은 믿을 만하다

 초원의 저 끝에서 마른풀을 쓸며 불어오는 바람에 입술을 대고 쪼그려 앉아 또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

 이렇게 외치는 건 기린이 아니야

 그늘이 점점 작아지는 큰 나무, 나뭇가지에 목을 기대고 기린은 단지 먼 곳을 바라보다 잠깐씩 졸다

 

 오늘은 흘러내리는 기분, 바람이 불 때마다

 기린의 목에서 마른 풀 냄새가 피어오르고 나는 아무도 없는 창밖을 보다

 다시 푹신한 소파에 누워, 희미해지도록

 멀뚱히 기린이 바라보고 있는

 한낮의 지평선

 한 통의 아이스크림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산무진 - 김훈  (0) 2008.09.02
대도오 - 좌백  (0) 2008.09.01
악인 - 요시다 슈이치  (0) 2008.08.26
공부하다 죽어라 - 현각,무량 외  (0) 2008.08.26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 안도현  (0) 2008.08.2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