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뜬한 잠, 박성우, 창비, 2007(초판2)

 

 

 

 

 

목도리

 

 

 뜨개질 목도리를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왠지 애인이 등 뒤에서 내 목을 감아 올 것만 같다 생각이 깊어지면, 애인은 어느새 내 등을 안고 있다 가늘고 긴 팔을 뻗어 내 목을 감고는 얼굴을 비벼온다 사랑해, 가늘고 낮은 목소리로 귓볼에 입김을 불어넣어온다 그러면 나는 그녀가 졸린 눈을 비비며 뜨개질했을 밤들을 생각한다 일터에서 몰래 뜨다가 걸려 혼줄이 났다는 말을 떠올리며 뭐하러 그렇게까지 해 그냥 하나 사면 될 걸가지구, 라고 나는 혼잣말을 한다 그러다가는 내 목에 감겨 있는 목도리는 헤어진 그녀가 내게 마지막으로 선물한 것이라는 것에서 생각을 멈춘다 애인도 손을 풀고는 사라진다

 

 

 

 

 

 

 

오두막 이야기

 

1

 

가늉이와 심삐댁 내외는 외따로 있는 오두막에 살았다

 

심삐댁은 으레 깔리는 새벽안개처럼

밥때에 맞춰 마을로 내려왔다

 

꿰맨 바가지 쭈뼛쭈뼛 내밀었다가 해죽해죽, 거둬갔다

 

마을 아낙들은 심삐댁한테서

어버버,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들은 적이 없어

식은 밥이며 나물이며 김치쪼가리며

시래깃국 건더기 따위를 뜸북듬뿍 담아주었다

 

2

 

모질이 새신랑 가늉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밥 먹고 똥 싸는 일 말고 한 가지가 더 있어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오두막을 들썩이게 했다

 

쌩긋쌩긋, 심삐댁은 갓난아이 업고 나타나

마을잔치 내내 설거지를 도왔다

 

사뿐사뿐, 정골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심삐댁의 손에는 떡 보자기가 들려져 있었다

 

인절미 챙겨주던 정양골할매가 목놓아 울던 밤,

지들이나 처먹지 지들이나 처먹지

찰떡 같은 달이 목메게 차올랐다

 

심삐댁은 젖은 베개 달래어 젖을 물렸다

 

 

 

 

 

 

 

 

버릇

 

 

 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 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서도 그보다 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

 

 

 

 

 

 

 

감자 캐기

 

 

꿩알이 놓여 있던 주위는

씨알이 좋아도 감자를 캐지 않았다

 

새참 시간이다

한바탕 감자를 캐던 어머니들이

호미를 놓고 둥그렇게 모여 앉는다

포장하던 아버지들도 저울질 멈춘다

양동이에 미지근해진 막걸리 붓고

박카스 다섯 병도 부어 휘휘 젓는다

 

멀리서 보면 감자 한 무더기로 보일

어머니들과 아버지들,

막걸리로 허기진 배 채운다

연거푸 받은 술에 취기가 올라온 나는

폴밭에 드러눕는다 슬슬 잠이 오는데,

어른들은 자리 털고 일어나 감자를 캔다

트럭에 감자 싣는다

비가 올 것 같으니 얼른 마무리하자 하신다

농사자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목구녕 안쪽으로 쏘옥 들어간다

 

하루 품삯으로 받은 햇감자 두 상자,

불룩하게 밀려나와 터질 것 같은 배를

테이프가 가까스로 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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