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박연준, 창비, 2007(초판1)

 

 

 

 

 

부엌 01:35 a.m.

 

 

바퀴벌레가 싱크대 앞을 지나간다

얼른 슬리퍼로 때려잡는다

후다닥 도망치다 압사당한 생,

사체는 그 자체로 비명이다

너의 더듬이가, 가는 다리들이 이 밤의 흐름 속에서 눌린다

내 반사행동 속에 숨어 있는 살기가 싱싱하다

얼마나 더 움직이는 것들을 죽이고 싶어하는지

살인 후의 긴장감으로 속눈썹이 곤두선다

 

딱딱한 살인과 소리 없는 죽음 사이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식탁의자들,

그런데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바지런한 다리들

허옇게 질린 슬리퍼는 제 몸이 칼인 줄 알았을까?

 

서슬이 퍼런 팔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한밤중 뭉개진 생의 자국을 관람한다

 

 

 

 

 

 

 

 

 

 

 

 

 

싹이 난 감자

 

 

1

 

감자를 꺼내다 떨어뜨렸다

무서워서 온몸이 떨렸다

도대체 얼마나 화가 났으면

몸 곳곳에서 뿔이 뻗어나왔을까?

 

2

 

나는 무당처럼 몸을 떨며 발작을 했고

아버지가 나를 향해 엎드려 절했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뿔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버지 뿔을 저리 치워요! 저리 가서 혼자 죽어요!

 

여름 내내 해는 독을 뿜어댔고

내 안의 암세포가 진하게 화장을 하자

치마를 벗은 뮤즈들이 꾸역꾸역 질 속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자주 눈을 뒤집어까고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드렸다

방바닥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화려하게 발기한 소주병들이 집 안 어디에서나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소주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덩달아 홀레붙은 아버지를 등지고

엄마는 어둠속에서 눈을 뱉어내고 있었다

엄마의 눈은 뱉어내도, 뱉어내도, 다시 생겼다

나는 물컹한 눈알들을 보이는 대로 밟았다

아침이 오면 순하게 구겨진 어린 남동생은

가방을 메고 등교했다

 

우리는 모두 흙속에 있었고, 밖에서는 간혹 꽃이 핀다고도 했다

 

 

 

 

 

 

 

 

 

 

 

새벽 2

 

 

차갑게 식은 커피 속 누군가 흘려놓은 입술

홀로 신호등을 건너는 비닐봉지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울리는 자동차 경적

아파트 창문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하는 담배꽁초

쓰레기통 주위를 서성이는 새끼 밴 암고양이, 노란 눈

하늘엔 노란 달, 하늘이 빤히 뜨고 있는 외눈

외로움 때문에 그림자만 길어진 마른 나무

어제 태어난 사람, 인큐베이터 안을 들여다보는 생

그 메마른 눈초리, 뾰족한 이빨

다시, 창문 너머로 달려가는 바람

 

달빛에서는 건초 냄새가 난다

나비들은 겨울의 모퉁이에 와서 죽는다

새벽 2라는 절벽에 매달려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아버지

 

 

 

 

 

 

 

 

 

 

흔적

 

 

남자의 가슴이 왜 좋은지 알아요?

종이처럼 평평하니까

여자의 가슴이 왜 좋은지 알아?

무덤이 두 개나 있으니까

 

그날, 엎질러진 밤은 환하게 어두웠다

밤이 환할 수 있다니

내 무덤가에서 밤새 뒤척이던 손가락들은

아침이 되자 무덤 속으로

아예, 아예 들어가버렸다

 

혼자 목욕을 하는 저녁이 찾아왔을 때

외로운 팔과 다리, , , 가슴, 흐린 얼굴

도저히 내 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각각의 개체들이

거울 속에서 서로 어색하게 꿈틀대고 있을 때

하얗고 둥그런 왼쪽 가슴에 난 이빨자국

보랏빛으로 선명하게 찍힌 당신의 자국

 

이렇게 금세 흔적을 남기다니

내 몸은 소문이 빨라

맨 아래 발가락들까지

열 가지 목소리로 수군대고 있는데

보랏빛은 지워지지도 않는데

어둠이 환할 수 있다니

 

 

 

 

 

 

 

 

 

 

 

 

이별

 

 

천 날의 밤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밤이었다

그가 내게 이유를 물었다

구두굽으로 그저 모래를 콕콕 찍었다

모기 한 마리가 내 슬픔을 염탐하듯

발목에 슬쩍 달라붙었다

갑자기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키 작은 나무들이 금세 흠뻑 젖었다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내 이름을 부르는 다급한 소리가 발밑으로 툭,

떨어졌다

흐느적흐느적 빗속을 걸었다

나무들이 일렁이며 저희들끼리 수군댔다

 

 

 

 

 

 

 

 

 

 

 

 

그 머슴애, 지금

 

 

그 털북숭이 머슴애 어떻게 됐을까?

   다리 예쁜 여자가 좋아

   다리 모양은 성기 모양과 같아

하고 까불던 털북숭이 그 머슴애

입으로는 삼천 궁녀 치마 속을 다 다녀온

감은 속눈썹, 엉큼한 그 머슴애

하품을 하다말고 별안간

딱 열아홉 해만큼 자란,내 무딘 젖가슴

고추장 찍듯 살짝 찍어보더니

곱슬머리 끝까지 빨개져서는

뒤돌아 뛰어가던 그 머슴애

투박한 손가락

소풍 같던 스무살

지금은

어디 있을까?

 

 

 

 

 

 

 

 

 

 

 

 

일곱살, 달밤

 

 

할머니는 자주 틀니를 잃어버렸어요

나는 소파 밑과 싱크대 위, 화장실 구석구석까지

혀를 날름거리며 핥아보았지만, 없었어요

밤은, 7년째 계속되었어요

할머니는 물컹하고 축축한, 검은 동굴 속으로

아무거나 자꾸 삼켰고, 그때마다 나는 잔소리를 해야 했어요

 

엄마는 빨간 핸드백을 남기고 떠났어요

나는 가끔씩 핸드백 속으로 기어들어가 놀았어요

그곳에서 엄마는 아무도 모르게 숨죽여 자라다가

돌아서서 몰래몰래 늙어갔어요

나는 자주 빨간 핸드백을 옆구리에 끼고

할머니의 고무신을 끌며 옥상으로 올라갔어요

 

두 개의 달이 떠오르던 어느 밤

내 두 개의 엄마들은

서로 나를 낳지 않았다고 변명했어요

나는 돗자리 위에 누워 가느다란 종아리를 흔들며 웃었어요

어둠이 동공을 크게 열며 내 이름을 부르자

슬퍼진 별들이 내 작은 몸을 옥상 아래로 떨어뜨렸어요

옆구리에 박힌 빨간 핸드백은 날개처럼 파닥이고

밤의 앙다문 입술 사이로,

달이

아슬아슬하게 끼여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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