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어빈 얄롬, 리더스북, 2008(초판5)

 

 

 

 

 

 

 

 

 이것이 영원한 내 삶의 몫일까? 나는 베르타의 기억이 영원히 공연되는 무대에 불과한 운명일까?

 

 

 

 제겐 도리란 단어가 너무 무겁고 억압적으로 들리는군요. 저는 한 사람에게만 도리를 다하는 건 포기했어요. 제 영원한 자유를 위해서죠. 결혼과 그로 인한 소유와 질투라는 한 쌍은 영혼을 노예로 만들거든요 저는 남자든 여자든 서로의 나약함으로 인해 억압받지 않는 그런 시대가 오기를 바란답니다.

 

 

 

 우울한 기간이 있지요. 누군들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우울함이 날 삼키지는 못합니다. 그건 병이 아니라 내 존재니까. 그런 걸 버틸 용기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가뭄은 그를 처지게 만들었다. 겨울은 정신적인 파상풍이나 다름없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요. 대체로 묻지 않은 질문이 더욱 중요한 법이니까요!

 

 

 

 신의 손에 모든 걸 맡기겠다는 환자의 소망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건 단지 유치한 아이의 소망에 불과합니다. 그 이상은 아니거든요. 죽지 않으려는 소망이자, 우리가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영원히 부풀어있는 젖꼭지일 따름이지요.

 

 

 

 죽음은 각 개인에게 고유한 것이지요. 각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죽음을 실행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는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을 앗아갈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빼앗는다는 건 위안이 아닙니다. 그건 잔인한 겁니다!

 

 

 

 죽은 자의 최후의 보상은 더 이상 죽지 않는 것이라!

 

 

 

 사실상 자기 머리는 책을 임신하고 있으며, 자기 두통은 두뇌의 산고라고 하더군.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무엇이든지 결국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극도의 긴장이 통찰의 대가라면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그런 대가를 치를 정도로 난 부유합니다.

 

 

 

 제 일과는 두 부분으로 나눠졌어요. 베르타와 함께 있는 나, 그녀와 다시 만날 것을 기다리고 있는 나로 말입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첫번째 단계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타인들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 겁니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보다 남의 말을 듣는 것이 훨씬, 훨씬 더 쉬우니까요.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한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버리고 자기 인생을 탐구하는 데 바쳐야 한다. 그 점을 난 스물한 살에 깨달았어요.

 

 

 

 딱히 남을 할퀴는 발톱이 없다고 해서 자신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린 욕망의 대상보다 욕망 그 자체를 더 사랑한다

 

 

 

 안전한 삶은 위험하다.

 

 

 

 어릴 적부터 난 인생을 두 개의 텅 빈 공간 사이에서 터지는 불꽃이라고 생각했어요.

 

 

 

 여자를 사랑할 때는 깨끗한 피부 아래에 있는 피, 핏줄, 지방, 콧물, 용변 등 생리적인 추함에 눈이 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눈을 감아야 하는 것, 진리를 외면해야 한다는 것이죠. 진실하지 못한 삶은 살아 있는 죽음이거든요!

 

 

 

 요제프, 사람은 죽음을 견뎌야 한다거나 죽음과 타협해야 한다고 가르치진 않겠소. 그건 삶에 대한 배반이니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올바른 때에 죽으라는 것이오!

 

 

 

 살아 있을 때 살아라! 삶을 최대한 누릴 때 죽는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올바른 때에 살지 못하면 올바른 때 죽지도 못한다.

 

 

 

 심장이 시간을 똑딱똑딱 알립니다. 시가의 탐욕은 끝이 없으니까. 시간은 게걸스러운 포식자거든요. 아무것도 되돌려주지 않아요.

 

 

 

 이 순간만이 영원히 존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당신만이 당신의 유일한 관객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려면 자신부터 먼저 커져야죠.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동물적 욕구 때문에 혹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거나 자신의 결핍을 땜질할 요량으로 아이들을 키우게 됩니다. 부모의 의무는 자신의 분신이나 또 다른 요제프가 아니라, 좀더 고귀한 무언가를 생산하는 겁니다.

 

 

 

 지도자라면 급류 옆에 있는 난간이 되어야지, 목발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가 옳았다. 필요에 의해서 아이를 낳고, 외로움을 덜어보려고 아이를 이용하고 자신의 또 다른 복제판을 재생산해내면서 삶에 어떤 목적을 마련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난 단지 서로 충분히 관계를 맺으려면, 먼저 자기 자신과 관계 맺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만일 우리가 자신의 고독을 감쌀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을 그저 자기 고독을 막아줄 방패막이 정도로만 이용할 거라는 거죠.

 

 

 

 루 살로메라는 여자가 나의 마음속에 쳐들어와 아예 살림을 차린 거예요.

 

 

 

 고통받는 친구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려거든, 침대는 딱딱한 침대나 야전침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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