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기자
전시언론통제 곁에는 늘 ‘애국주의 언론’ ‘민족주의 언론’을 살포한 대가로 몸집을 불린 언론사들이 포진해 왔다.
숫자만 날뛰는 그 참호 안에서는 속절없이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일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일도 모조리 허튼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옆 사람을 쳐다보지 않듯이 그이들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적어도, 이 포성이 멈출 때까지는 동지도 없다. 참호는 굳어버린 몸뚱어리와 멈춰버린 의식이 꾸역꾸역 토해낸 쓰레기 같은 정서들로 썩어 문드러진다.
그렇게 잠자는 개에서 나는 나를 관찰하고 다른 이들을 엿보면서 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포착했다. 공포를 잊고 전선을 뛸 수 있는 ‘조건’ 가운데 하나가 내 몸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이 나를 지켜본다.’ 이 단순한 말은 모든 공포심을 잊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전선심리였다. 잠자는 개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주기’로 버텨나가는 생존 현장이었다. 나는 잠자는 개에서 그 ‘타인’이라는 조건을 처음 발견했다.
‘전투는 보여주기 위한 행위였다.’ 전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민주주의나 독립 같은 추상적인 대상을 쫓아 치르는 의식이 아니었다. 전투는 연극과 같았다. 연출가들이 ‘의식’을 강조하며 백날 떠들어대 봤자 배우들 몸은 ‘관객’과 교통함으로써 에너지를 얻듯이, 지휘관 ‘명령’과 상관없이 잠자는 개 전사들에게도 치고 받는 행위를 봐줄 ‘관객’이 필요했다. 그렇게 남에게 나를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전투였다. 그 무대가 바로 전선이었다.
전선에서도 용맹스런 전사와 그렇지 않은 전사 차이가 별로 없다. 그런 건 영화에서 돈 많이 들인 주연 배우와 적게 들인 조연 배우를 구분하기 위한 조작일 뿐이다. 전사들이 뒷걸음질치거나 공황상태에 빠져 눈동자가 풀린 경우는 제2선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제2선에서 나는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최전선이란 곳은 이미 나를 보여주기 위한 최고의 무대란 사실을 전사들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걸 ‘과시욕’으로 부르기엔 적합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은연중에 에너지를 주고받는 화학작용 같은 것이다 보니, 예컨대 전쟁터를 향해 들어가는 전선기자들이 사지에서 빠져나오는 공포에 질린 피난민들과 부딪치면서 묘한 에너지를 얻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그 무렵, 내가 본 버마전선과 외신보도 사이에 차이가 났던 것은 취재지역 깊이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전선에서 떠나는 난민들 등을 바라보았다면, 외신들은 타이 국경을 넘어선 난민들 얼굴을 바라보며 받아쓴 취재였던 차이다.
카불 밤길은 ‘움직임’이 없었다. 암흑천지에서 ‘움직임은 곧 과녁이 된다’는 사실을 모든 생명체들이 14년 전쟁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고통에도 비명에도 평등은 없었다. 똑같은 포탄을 맞고 똑같은 중상을 입고 실려 와서도 시민들은 겁에 질려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했지만, 전사들은 마음껏 비명을 질러댈 수 있었다. 바로 일그러진 카불전쟁의 정직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탈리반을 취재했던 기자 수는 전세계를 통틀어도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데,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엄청난 탈리반 뉴스가 쏟아져 나왔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문제는 결국 편견 – 주로 미국 언론들이 쏟아내던 용어와 내용을 그대로 베낀 – 으로 뒤덮인 비과학적 보도였다.
탈리반이 세계 시민 사회의 중심 화두로 떠오른 ‘반미’를 외쳤든 말든, 탈리반은 미국이 창조해낸 부패한 ‘작품’일 분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불법 ‘이란 혼란조성용 자금’ 가운데 일부를 파키스탄 정보국(ISI)을 거쳐 몰라 오마르에게 지급함으로써 탈리반이 태어났다.
‘하자라는 돌에서 빵을 찾는다’(Azra rozi az sang paida mona) 굶주린 바미안 아이들이 그렇게 속담을 쫓고 있었다.
그러나 각국 정부는 고질적인 그 ‘침묵근성’을 지켰을 뿐, 하루아침에 수천명이 죽어나가는 하자라 학살을 놓고도 그 흔해빠진 성명서 한 장 날리지 않았다. 돌고래 몇 마리만 자빠져 죽어도 외신 톱에 올리던 언론들도 하자라 학살에는 눈을 감았다.
‘잘린 잡초가 더 날카로워진다(shisha ke maida shod, tiztarmusha)’. 하자라는 지난 천년 세월 갖은 박해 속에서도 이 금언 하나를 안고 잡초처럼 견뎌왔다.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우리는 팀 페이지(Tim Page)라는 빼어난 전쟁사진기자를 배출했다. 발길 닿는 대로 아시아를 떠돌던 스무 살짜리 청년 팀은 내로라하는 사진기자들이 득실거리던 베트남전쟁에 뛰어들어 감각적인 사진을 뽑아내며 <라이프> 잡지에 사진을 팔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팀은 곧장 유명해졌다. 훌륭한 사진기자가 아니라 중상을 당한 사진기자로 먼저 이름을 날렸다. 1966년 불교도 봉기 취재 중 머리와 가슴에 중상을 입었던 팀은 일어나기 무섭게 다시 1967년 미군 B-57 오폭에 걸려 12번이나 대수술을 받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전선으로 달려갔던 팀은 1969년 지뢰를 밟아 5cm가 넘는 파편이 오른쪽 눈 위 이마를 관통해서 뇌에 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사경을 헤매던 팀은 도쿄와 워싱턴 미군병원을 거쳐 뉴욕 재활의학연구소에 이르기까지 열여덟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기자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 나는 그런 식의 말들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관심도 없다. 그 ‘중립’이란 말은 백인∙기독교∙자본주의∙서양중심주의로 무장한 국제 주류언론들이 떠받드는 신줏단지였다. 그이들은 그 단지 밑에 숨어 자본을 증식해 왔을 뿐이다. 그런 국제 주류언론들 입장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어김없이 ‘중립성’ 논란이 일었고 그 당사자는 몰매를 맞았다.
“팔레스타인 시민을 학살해 온 이스라엘은 용서하면서,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정당한 독립투쟁은 저주하는 이 현실을 당신들은 정의라 부르는가? 한국에서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던 이들을 테러리스트라 불러왔던가?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한 내 투쟁을 놓고 테러리스트라 부른다면, 난 그걸 가장 명예로운 훈장으로 받아들이겠다.”
- 아흐마드 야신(Ahmad Yasin) 하마스 최고지도자. 2000년 11월 인터뷰에서.
‘군인들이 중무장 공격용 무기로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했다면, 그건 명백한 학살행위다.’ ‘정부가 정규군을 동원해 상대국 영토에서 시민을 공격했다면, 그건 명백한 전쟁행위다.’
이스라엘 군은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분명히 그런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모든 국제언론들은 ‘학살’과 ‘전쟁’이라는 용어 대신, 이스라엘 정부가 사용한 ‘시위’라는 용어를 그대로 받아 적었다. 이스라엘이 가해 행위를 은폐할 또는 축소할 목적으로 선택한 그 ‘시위 진압’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받아썼든, 아니면 생각 없이 베껴 썼든 국제 언론은 모두 이스라엘 군 범죄행위에 ‘공범’이 되는 셈이다.
어떤 시위대에게 최정예 M-60 탱크가 불을 뿜고, 어떤 시위 현장에 가공할 공격용 아파치 헬리콥터(AH-64A)가 로켓포를 쏘아대고, 어떤 시위 지역에 F-16 전투기를 띄워 공습하고, 어떤 시위 보복에 군함이 함대지 미사일을 발사한 적이 있었던가?
위에 등장하는 무기들은 전쟁 가운데서도 그야말로 심각한 전쟁에서나 사용하는 것들이다. 나는 그런 대량학살 무기들로 민간인 시위를 진압했다는 소리를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무기들로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살해한 이스라엘 군대의 행위는 시위 진압이 아니라 전쟁이란 말이다. 그렇게 왜곡되어 버린 용어 하나 탓에 팔레스타인 시민들은 늘 ‘이중희생’을 당해 왔다. 하여 이스라엘은 늘 시위 진압만 하는 온당한 주체로 여겨져 왔고,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은 늘 테러리스트로 몰려 왔다.
좋은 비교거리가 하나 있다. ‘9∙11 공격’으로 세계무역센터가 허물어진 현장을 놓고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이어 제로’(Year Zero)란 용어를 썼다. 미국 언론들은 핵폭발 현장을 뜻하는 군사용어를 통해 세계적 규모의 동정심을 자극하며 미국식 국제질서에 온 인류를 한 줄로 세웠다. 그 과장된 미국식 ‘이어 제로’와 그 축소된 이스라엘식 ‘시위’라는 두 용어 사이에 흐르고 있는 국제적 음모를 언론들은 고민해 보았을까?
‘군인들이 신경질을 부릴수록, 그 전쟁은 정당성이 부족하다.’
<템포>의 고단한 언론자유 투쟁은 아체전쟁에서도 또 탈이 났다. 모든 신문들이 5월 23일치에서 군부가 바라던 대로 ‘정부군, 반란 7명 사살’로 제목을 뽑았으나, 일간 <코란템포KoranTempo>만은 ‘정부군, 시민 7명 살해’로 1면 톱을 걸었다. 군부는 노발대발했다.
군인과 동류의식을 느끼는 순간부터 전선기자로서 생명은 끝장나고 만다.
1964년 5월 25일 미군 T-28 전폭기가 난데없이 샹쾅에 나타나 227kg짜리 네이팜(Napalm)탄을 쏟아부으면서 시작한 ‘비밀전쟁’은 1973년까지 무려 200만톤에 이르는 각종 폭탄 700만개를 라오스에 투하했다.
‘포탄 200만톤’, ‘폭탄 700만개’ 이런 수치는 군사 전문가가 아닌 시민들로서는 실감하기 어려운 단위일텐데, 그때 라오스 총인구가 400만명이었으니 국민 1인당 폭탄 1.75개씩에다 0.5톤씩을 뒤집어 썼다면 감이 잡힐까? 미국이 30만톤을 퍼부었던 샹쾅 주민 15만명 머리 위에는 1인당 무려 2톤씩이 떨어졌다.
미군은 그 엄청난 폭탄을 라오스에서 쏟아붓고자 9년 동안 무려 58만 344회나 출격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건 9년간 평균 7분30초마다 한 번씩 라오스를 공습했다는 뜻이다.
군사전문가들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 공습용 폭탄 불발 비율이 30%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렇다면 라오스에는 지금도 ‘210만개’ ‘60만톤’에 이르는 미군 불발탄이 살아 있다는 말이다.
미국이 노린 그 ‘적’이, 그 집속탄이 잡아먹은 그 ‘적’이 바로 아로운 같은 다섯 살배기 아이들이었다. 집속탄을 던지거나 두드리며 놀던 그 아이들이었다. 상식적으로 집속탄 알갱이를 가지고 놀다 죽을만한 군인들은 이 세상에 없다. 정규군이든 게릴라든, 훈련받은 시민이건 아니건, 성인이라면 그런 수상한 물체를 노리개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처음부터 집속탄을 뿌린 미군의 적은 분명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집속탄 희생자가 거의 모두가 어린이들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걸프전 참전군인이기도 했던 스티브 윌슨(Steve Wilson) 지뢰자문단 샹쾅 책임자 말마따나, 집속탄은 ‘어린이 저격용’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 아이들을 골라 살해하는 악질 중에서도 최악질 폭탄이다. 미군이 라오스에 투하했던 집속탄 BLU-26 같은 것들은 알갱이 모양과 크기가 꼭 정구공만한데다, 이미 30~40년 동안 흙에 뒹굴면서 녹슬어 숲이나 돌덩이에 섞여 있으면 가려내기조차 힘든 상태다.
라오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비밀전쟁’을 멈추게 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모두 미국 마음먹기에 달렸다. 미국이 그 ‘비밀전쟁’을 인정하고 만천하에 낱낱이 진실을 고백하면, 그 길로 전쟁은 바로 끝이 난다. 장담컨대, 인구 400만 라오스가 인류 역사상 최고무장대국인 미국을 물고늘어져 계속 전쟁을 벌이자고 할 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없다.
왜 미국은 국제재판에서 사력을 다해 이 ‘1969~1973년’ 기간을 제외시켰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1969~1973년’ 사이에 미국이 먼저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걸 편의상 제1기 킬링필드라 부른다면, ‘1975~1979년’ 민주캄푸치아 집권기에 발생했던 학살은 제2기 킬링필드에 해당한다. 캄보디아 양민학살은 그렇게 10년 사이에 서로 다른 두 집단이 두 번에 걸쳐 자행했고, 따라서 민주 캄푸치아 기간만을 조사 대상으로 삼는다면 킬링필드 역사를 온전히 밝혀낼 수 없다.
“73년, 해거름 메콩강가에서 멱을 감던 중 폭격을 당했어. 아버지, 동생, 아들 둘에다 조카 둘까지, 한자리에서 가족 여섯을 잃었지. 우리 마을엔 베트콩도 크메르루주도 없었어. 있었다면 미군 낙하산부대원이었던 나를 살려 뒀겠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미군 특수부대원으로 베트콩 소탕작전에도 참여했던 깜뽕프놈마을 소본씨 말이다.
1973년 6월 19일 캄보디아 폭격 명령 거부죄로 법정에 서면서 반전운동을 폭발적으로 고양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던 도널드 도슨 대위(Donald Dawson, 당시 B-52 부조종사) 말을 들어보자.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지만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공격 목표물로 삼았다.”
온 세상을 흔들어놓던 그 ‘코소보전쟁’에 한국 기자는 단 한 명도 현장에 없었다. 신문∙방송 할 것 없이 한국 언론 전체가 코소보전쟁 두 달 보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신만 베껴먹었다.
실제로 당시 난민촌을 둘러본 기자들도 감탄했다. 난민촌에 병실 250개짜리 호화판 병원이 들어서는가 하면, 샤워장엔 펄펄 끓는 물이 흘렀고, 유치원에는 독일 어린이 표준용 자전거와 장난감이 넘쳐났고, 파리 표준 화장지와 생리대가 여기저기 뒹굴었다. 기자들은 그런 실상을 ‘파이브 스타 난민촌’(five star refugee camp)이라는 제목을 달아 전송했다.
난민들에게도 마땅히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게 내 믿음이다. 난민들 먹고 입는 걸 보며 배아파할 일도 없고, 화장지나 온수 따위로 질투할 일도 없다. 문제는 ‘왜 코소보 난민에게만?’ 이라는 의문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에 넘쳐나는 난민들은 왜 코소보 난민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알바니아에 남은 그 떨떠름한 뒷맛은 말할 것도 없이 나토 군사작전이 남긴 유산이었다. 나토는 처음부터 난민 발생에 따른 동정심 유발을 통해 국제사회의 여론을 몰아가며 대유고공격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나토는 유럽 중심부가 난민 문제로 골치 앓지 않도록 가난한 변방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를 ‘난민저장소’로 선택했다. 목표는 적중했다. 국제사회는 ‘인도주의’라는 한마디에 질려 찍소리도 내지 못한 채 두 달 보름 동안 코소보전쟁을 지원했다. 그리고 서유럽은 지저분한 난민 문제 없이 깨끗하게 막을 내렸다.
“게릴라전이란 건 왜 싸우느냐가 중요하지, 어떻게 싸우느냐가 중요하지 않아. 게릴라전에서는 당장 이기고 지고도 없어. 얼마나 오래 끌 수 있느냐가 생명이야. 게릴라전은 수가 많고 적음도 중요하지 않아. 상대는 어차피 전쟁이야.”
- 보먀 장군(Gen. Bo Mya. 카렌민족해방군 최고사령관), 1933년 인터뷰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외세가 사라질 그날을 나는 해방이라 부른다. 그날까지 나는 싸울 것이다. 그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나는 어떤 외세와도 손잡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절대 아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두 번씩이나 농락했고, 머잖아 아프가니스탄을 세 번 죽일 것이다.”
- 아마드 샤 마수드(Almad Shah Masoud), 1997년 인터뷰에서.
탈로칸(Taloqan)에서 헬리콥터 손질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마수드에게 다가온 시민들이 저마다 마수드를 만져보고 갔던 까닭을 곱씹는 동안 저녁이 들어왔다. 문가에 앉아 있던 마수드는 열서너 명이나 되는 부하들 그릇에 손수 밥을 퍼담았다. 마수드는 밥상에 앉아서도 부하들에게 양고기를 찢어 올리느라 자기 입은 돌볼 겨를이 없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왜 전사들이 “마수드”를 외치며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갔던지를! 왜 전장에서 죽어 가는 전사들이 “마수드”를 외쳤던지를!
나는 지금까지 테러리스트라 불린 이들을 수도 없이 취재해 왔지만 아직도 ‘테러리스트’가 무슨 말인지 그 정확한 뜻을 모른다. 거저 어림짐작으로 ‘테러리스트란 미국에 해로운 행위를 하는 개인∙집단∙국가’쯤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이건 ‘반미’라는 내 고질병 때문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그렇게 드러난 탓이다.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를 판단하고, 그 미국 정부가 작성한 명단에 오르는 순간부터 그게 누구든 테러리스트가 되고 마는 현실이니 말이다.
예컨대, 한국을 공격한 적도 없고 한국 재산을 파괴한 적도 없고 또 한국 여행자 하나 해코지한 적도 없는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같은 나라들을 우리는 미국식 ‘언어’를 따라 테러리스트 국가라 불러 왔다.
카렌민족해방군과 타밀타이거는 모두 정부군을 상대로 자치∙독립을 내걸고 무장투쟁을 벌여온 단체다. 두 쪽이 모두 공고시설이라는 다리도 폭파시켰고 정부군도 죽였고 민간인도 죽였고, 차이가 별로 없다. 그런데 한쪽은 민족해방투쟁가고 다른 한쪽은 테러리스트다.
테러리스트 등록 ‘특허권자’ 미국도 그리고 국제사회도 그 타밀 시민 5만명 죽음 앞에 눈길 한 번 준 적 없다. 그런 이들이 어째서 타밀타이거에게는 유독 그렇게 날카로운 정의의 칼을 들이댈 수 있단 말인가?
“난 내일이든 모레든 일단 가능한 한 빨리 발리로 빠져야 해. 이번 주 커버시트리를 막아야 하는데, 여기서는 사진 전송도 불가능한데다 노트북도 깨진 상태고. 아직, 그 샤나나 인터뷰 기사도 날리지 못했어. 일 끝내고 바로 되돌아올 계획인데, 한 삼사일쯤 걸리지 않겠어?”
“살다 보면 그럴 때도 있잖아. 힘내! 떠나고 말고는 개인 문제잖아. 다만 동티모르를 꾸준히 취재해 왔던 경험 많은 기자들이 서둘러 철수했던 건 정말 뜻밖이었어. 만약 내가 철수 대열에 낀다면 앞으로 거울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냥 남았던 거야.”
그 무렵, 딜리 시민들은 유엔 요원들과 기자들에게 떠나지 말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모든 외국인들이 떠나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그이들이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누구보다 자유로운 신분을 지닌 기자들이, 누구보다 보호받는 입장에 있는 기자들이 가장 먼저 철수했다는 사실은 나를 포함해 당시 딜리를 취재했던 모든 기자들에게 ‘개꼬리’를 달아 두고두고 비난거리로 삼아도 좋을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예멘에서도 어느 전쟁터에서도 전선기자들은 시민들이 떠나고 난 다음 늘 막차를 탔고, 우린 그걸 명예로 여겨왔다. 또 어느 전선에서고 기자들이 적어도 유엔기구나 국제적십자 요원들보다 먼저 철수한 경우는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뛰었던 전선에서는 늘 그랬다. 기자들은 어떤 경우에는 최후까지 현장에 남아 뉴스를 정리해야 할 의무를 지녔고, 따라서 사회는 기자들에게 많은 양보와 편의를 제공해왔다. 심지어 ‘전시기자 보호’를 국제법으로까지 만들어 줄 만큼.
그런 시민사회를 그날 동티모르 취재기자들 모조리 배반했다. 하여, 1999년 9월 동티모르 취재단은 내남없이 모두 직무 유기 혐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다. 그럼에도 그날 그 딜리를 철수했던 기자들이 용서를 빌기는커녕, ‘주거니 받거니’ 기자들끼리 인터뷰하며 서로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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