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 2008겨울(35호)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어두운 낯빛으로 바라보면 물의 빛도 어두워 보였다
물고기들이 연신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는 것은
어둠에 물들기를 거부하는 몸짓이 아닐까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에 취하지 않는 물고기들,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몰골은 어떻게 보일까
무작정 소나기 떼가 왔다
온몸이 부드러운 볼펜심 같은 소나기가
물 위에 써대는 문장을 물고기들이 읽고 있었다
이해한다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그들의 교감을 나는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살면서 얻은 작은 고통들을 과장하는 동안
내 내부의 강은 점점 수위가 낮아져 바닥을 드러낼 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풍성하던 어족(魚族)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후로 내 문장엔 물기가 사라졌다
물을 찾아온다고 물기가 절로 오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물이 잔뜩 오른 나무들이 그 물기를 싱싱한 잎으로
표현하며 물 위에 드리우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나를 부끄럽게 했다
물을 찾아와 내 몸이 조금이나마 순해지면
내 문장에도 차츰 물기가 오르지 않을까
차츰 환해지지 않을까
내 몸의 군데군데 비늘 떨어져나간 자리
욱신거렸다
이 몸으로는 저 물속에 들어가 헤엄칠 수 없다
마법
등을 보이며 떠나는 사람은
결국 내게로 걸어오는 것이라고
내가 나에게 마법을 건 적이 있다
지구는 둥그니까
둥근 지구를 돌고 돌아
내게로 다시 걸어오고 있는 것이기에
기다리면 된다고 믿었다
그 일이 사랑이라고 적었다
스무 해 전의 일이다
지구는 참 먼 길인가 보다
해가 돌아오는 지평선에 서서
달이 돌아가는 수평선에 서서
하루도 빠짐없이 그 사람 기다렸지만
아직 보이지 않는다
쉰
아침에 끓인 국이
저녁에 다 쉬어버렸다
냄비뚜껑을 열자
훅하고 쉰내가 덮친다
이 기습적인, 불가항력의 쉰내처럼
남자의 쉰이 온다
일상의 뒤편에서
총구를 겨누던 시간의 게릴라들이
내 몸을 무장해제 시켜놓고
나이를 묻는다
이목구비 오장육부
나와 함께 사는 어느 것 하나
나이 보다 뒤쳐서
천천히 오지 않는다
냄비에 담긴 국을
다 쏟아버려도
사라지지 않는 쉰내
냄비를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쉰내
이미 늦었다
나의 생은 부패하기 시작했다
내 심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빠르게 빠르게
타고 남은 재에 관한 소곡
건너편 아파트에 내 첫사랑 살고있다
베란다에 유모차 세워놓고
차 끓이는 냄새도 피워올리며…
그의 아내가 유난히 예쁘다는 소문도 들었지만
기실 그와 나는 손 한번 안 잡은 사이
그래도 언젠가 한 즐거운 약속은 안 잊고 있다
내가 딴 데 가서 아이를 열명을 낳더라도
기다리겠다 했다
후박나무 사이 건너편 아파트에
내 첫사랑 살고있다
오늘은 가을 날, 짐짓 그 쪽을 향해
나 지금 아이가 둘 뿐이라고 한번 소리질러 줄까
목소리를 다듬다가 아파트 마당을 내려다보니
왠 여자가 글쎄 우리집 창을 쳐다보고 있다
아이 둘을 양 손에 잡고 야릇한 미소까지 짓고 있다
나는 순간 창문을 드르륵 닫아
쓸데없이 들어오는 바람을 막았다
사랑이 식은 재가 칸칸이 담긴 탓일까
밤이 되니 창마다 불을 켜고 일어서는
아파트가 납골당처럼 찬란하다
꽃 한 송이
문 정 희
지난해 흙 속에 묻어둔
까아만 그 꽃씨는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 자리에 씨앗 대신
꽃 한 송이 피어나
진종일
자름자름
종을 울린다
키 큰 남자를 보면
문 정 희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피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돌아가는 길
문 정 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 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 서거라
나는 언어라는 것을 칼이 아니라 화살에 비유하는 것에 늘 동의합니다. 한번 어디 가서 박히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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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은 팬티와 같아서 누구나 입고 있지만 나 팬티 입었다고 자랑하지 않잖아요. 민족과 민주를 부르짖는 것이 나에겐 영 어색하고, 또 그로 인해 다소 나의 문학적 이미지에 이익이나 덤을 갖는 것이 부끄러워서 한 때는 그런 말을 입밖에 드러내기조차 싫어한 때도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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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양처’ ‘모성애’ 이런 단어는 남성언어라고 생각해요. 여성을 덮씌우는 언어이며 그 단어들은 우리 역사에도 없었어요. 근대에 와서 태어났지요. ‘에이드리언 리치’ 라고 미국 여성시인이며 유명한 페미니스트인데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 “모성애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단어들을 극복해야만 여성이 클 수 있어요. 위험한 이야기지만 모성을 다시 정비해야 하며 여성의 희생만 예찬되는 단어들은 어떤 혐의가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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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저녁에 죽는 시
40분하고도 5분이 지난다, 그는 안 오고
추적추적 비가 왜 오는가
벌써 몇 번
담배갑을 들고
경고!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를 읽는데
여자가 저기 혼자 와 앉는다
우산을 놓는 하얀 손이 길다
1시간이 넘었다, 너를 더 기다리겠는가
여자가 담배를 꺼낸다
여기 금연!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 가서 한 마디 하자,
우리 같이 죽을까요
담배 피우는 여자는 알겠지
사랑은 얼마나 해로운가
우리 그만 나가서
담배나 실컷 피울까요
바다는 짠 값으로 그녀를 고용했다
최금녀
그 여자다
-사모님, 남편 출세시키는 물 좋은 조기 왔어요
장수하는 고등어자반 왔어요……
태풍경보라도 돌았는지 호흡이 꺼칠하다
-사모님, 펄펄 뛴다니까요 파 마늘 풋고추 버무려서…..
절벽을 치고나가는 파도소리도 순탄치 않다
솨르르…… 인터폰 속에서
머리 위의 고무다라이가 강풍 속 범선처럼 기우뚱
-사무님, 새우젓갈치젓멸치젓……
그 여자는 칫수 작은 몸으로도
사리 조금 그뭄 태풍을 거뜬히 받아 이고
하루건너 아날로그 방식대로 썰물 밀물로 들이닥쳐
인터폰을 막고 선다
주름살보다 더 자글자글한 말솜씨로
-고등어자반한손은장수하는보약이지요삼겹살엔육젓이구요…..
-아들취직은아직안되었나요어쩐다지요자반한손줘요
-아이고고마우신우리사모님흐흐흐……
나도 모르게 그녀가 이고 온 바다 속으로 한쪽 발을 담근다
물속은 따뜻하다
그래서일까 어쩌다 바다지문이 인터폰을 건너뛰는 날엔
종일 파도소리가 나를 부르고
수심가의 가사 한 대목이 가슴 속에서 일렁거린다
그럴 때 나는 131을 눌러 일기예보를 듣기도 하는데
그런 날 내 계산은
바다가 너무 오랫동안, 너무 짠 값으로, 그녀를 고용했다는 것이다.
고백
그게 맨드라미꽃이였던가
맨드라미 꽃술에 꿀벌이 들자마자
신고 있던 고무신으로 냅다 나꿔채어
그걸 귀 가까이에다 빙빙 돌려본 것인데
아마 그때 웽웽 불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랬었구나 아무래도 결국엔
내 스스로의 화엄이든 연옥이든 어디든 가서
불을 맨발로 밟아 꺼야 할 것 같다.
길, 버드나무 숲에 들다
허름한 문 밖으로 행인들은 밀린 외상값처럼 지나간다. ‘구두 딱음’과 ‘구두 수선’이 엉성한 글씨로 붙어있는 가게. 등 굽은 신기료 장수가 희미한 백열전구에 눈을 비비며 헐거워진 시력을 깁고 있다. 한 땀 한 땀 그의 바늘에 꿰어 사람들이 오가는 골목, 충혈된 가로등은 늙은 마담처럼 벽에 기댄 채 졸고, 삼십 촉 전구보다 어두워 보이는 그의 등에 누군가 너덜거리는 일상 한 켤레를 던져두고 간다. 밀린 월세처럼 자꾸만 쌓여가는 구두. 문 밖 밀린 월세를 독촉하듯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지나간다. 딱음과 수선을 스치듯 잡은 구두통 속, 문득 잡히는 굳은 표정과 너덜거리는 뒤축을 가진 사람들, 거리를 서성이다 돌아온 안개와 눈 녹은 얼룩이 묻어오기도 하는 구두의 날씨, 재채기가 온 내장을 쏟아낼 것 같은 늦은 밤은 툭 툭 실이 끊기기도 한다.
새들은 전등 아래 내려 기워진 구두를 신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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