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호주에 가있던 친구가 한국에 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1년 반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전화 한 통 메일 한 통 문자 한 통 주고받지 않았던 친구가 연락을 해서
한국에 왔고, 지금 고향에 있고, 어렵지 않다면
20~30만 원 정도를 빌려줄 수 있겠냐고 했다.
호주에서 번 돈을 찾으려면 서울에 가야하고
서울에는 3월 달에 갈 예정이니 그때 갚는다고.
회사 생활 3년 동안
전세금 대출 받은 2천 만원 중에 겨우 4백 만원을 갚고
통장에 -15700000이라고 적힌 나는
알겠다고 돈을 부쳐주었다.
친구에게 돈을 꿔주기로 결심하는 순간
내 스스로에게서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때때로 봉사나 기부, 남을 돕는 행위에 푹 빠진 사람들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던 적이 많다.
특히 무엇보다, 남을 도우며 더 행복해하는 저 표정은
어떻게 된 걸까 싶었던 적이 많다.
어쩌면 그들이 그처럼 봉사나 기부, 남을 돕는 행위에 빠져드는 이유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오늘 들었다.
구원이란 애매한 말이다.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구원하며 또
대체 구원 했다, 구원 되었다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기로 결심하는 순간 내가 목격한 것은
내가 여태껏 보거나 듣지 못한 내 안의 존재가
명치 속에서 “휴우~ 살았다”라고 안도하는 것이었다.
그게 정확히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안에는 그런 게 살고, 혹은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길에서, 전화로, 메일로, 친구로부터, 아는 이로부터, 가족으로부터의
짜증날 정도로 많은 도움 요청 속에서,
특히나 그들의 공통점이 ‘나를 한 번도 도와준 적이 없다’는 사실일 때,
자주 찾던 카페의 방문을 줄이게 되고, 지갑을 꺼내 들 때마다,
뭍으로 나온 물고기가 물이 말라가며 헐떡이는 듯한 쪼들리는 소리를 듣게 되는 요즘에,
현명하지 못한 투자와 돈 씀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곤두세워져있는 요즘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서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수 십 가지의 이유들의 장벽을 뚫고
누군가를 도와주기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짐작도 못한 것이다.
거북한 부탁을 승낙했을 때 구원 받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될 줄은.
내 안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들일 때 겨우 숨을 이어가는 무언가가
살고 있거나 혹은 죽어가고 있었던 줄을.
남을 구하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것이라는
좀 과장되어 보이는 말의 시작을 알 것도 같은 경험이었다.
그렇다고 그 친구가 돈을 추가로 더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줄 생각은 없고, 어제, 오늘, 작년과 마찬가지로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버전의 구걸자들에게도
무언가를 선뜻 건네줄 생각은 없지만.
만약, 내 안에 존재하는 이것이 남들에게도 존재한다면
누군가를 돕고, 타인의 다급함에 공조하는 능력을 지닌 이것이 살아있다면,
우리가 자살을 반대해선 안 될 이유를 또 하나 찾은 셈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누구나
스스로의 이것을 죽어가게 놔두고 있으니까.
그것 또한 일종의 자살이니까.
타인을 도울 때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무엇이 살아나고 힘을 얻는다.
타인의 도움에 눈 감을 때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무엇이 힘을 잃고
관심을 잃고 결국엔 죽어 사라진다.
그 내 안의 무엇은 나의 일부일 테고.
나의 일부가 죽도록 방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자살을 경험하는 셈일 테니까.
죽어버린 눈으로 살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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