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투에 대해 말하다
1월 11일에 타투를 하나 했다. 조그맣게.
타투를 한다는 것은 자해를 하는 것과 같다.
타투 자체가 상처에 색을 넣어 아물게 하는 것,
즉 색깔 있는 흉터를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기의 몸에 스스로의 의지로 상처를 낸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해와 비슷하다.
다만, 그것은 파괴되지 않을 정도의 자해이며
후유증과 상처 후의 인생까지 계산된 자해이기 때문에
자해로 보이지 않는 자해이기도 하다.
계산적인 자해는 자해로서의 아픔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 몸에 단 하나의 그림이나 문장을 새겨 넣는다고
했을 경우에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무엇’이 없다는 데 그 고통이 있었다.
지울 수 없고 평생 눈에 띄게 흔적이 남을 것을
단 하나 선택하려 할 때 느끼게 되는 고통은
간절한 선택에의 강요로부터 오는 고통이며,
지금껏 나를 표현할 단 하나,
내 몸에 주저 없이 새길 단 하나의 ‘무엇’도 없이
살았다는 걸 직시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었다.
한편, 타투가 지닌 자해의 성격은 예술과도 닮아있다.
그것이 일종의 표현이라는 점, 그 표현할 무엇을
결국은 내 안에서 찾아내거나 키워내야 한다는 점.
타투 자체가 보수에 대해 저항적이라는 점.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무한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오늘날
남에게 멋져 보이기 위한 의도를 껴입음으로써
패션의 성향을 지나치게 갖게 되었다는 점.
소비와 과시적 행태에 오염되고 있다는 점이다.
타투가 지향해야 하는 단 하나는 언제나
영혼이다.(그게 있건 없건 간에)
때문에 타투가 패션화된다는 것은 영혼이 패션화된다는 것이다.
패션 월드에 빠져 열광하는 사람의 영혼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눈과 영혼이 봐야 할 것은
외면보다 내면이고, 반듯함보다 독특함이고, 아름다움보다 고통이다.
그 이유는, 아름다움만 보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을 감지하지 못한 채로
그저 일정 구역의 아름다운 섹터에서 살아가지만,
고통을 발견하고 그것을 없애려 노력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고통을 없애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실천자이며 진정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아질수록
우린 좋아하기 보다 긴장해야 한다.
세상이 아름다워진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곳에 몸을 누이고, 그것을 세상이라 부르게 된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수시로 자신의 세상을
빠져 나와 바깥에서 보아야 한다.
그런 이유로, 타투가 지향해야 할 것은
환타지이되 현실을 담아야 하며
겉보다는 본질이며
기교보다는 정신이며
쉽게 발견되는 장점보다는
묻어버리기 쉬운 내 단점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결국 내 손목에 자리잡은 것은
초라한 새 한 마리.
내가 날기를 꿈꾸는 것은
결코 내가 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새 한 마리.
나를 조롱하고, 내가 그것을 꿈꾸므로 인해
오염되어 날지 못하게 되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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