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영복, 돌베개, 2008(초판 21)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의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 선생님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켰던 해방 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합니다. 공자 이전 2500년과 공자 이후 2500년이지요.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아마 가장 철학적인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기를 쓰고 달려가야 할 곳이 없다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내가 무기징역 받고 감옥에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헌옷 입고 햇볕에 앉아 있을 때의 심사가 무척 편했던 기억도 없지 않습니다.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가정이 어려울 때 좋은 아내가 생각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단전의 해석에 근거하여 동양 사상에서는 지()와 음()의 가치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음과 양을 합하여 지칭할 때 양음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음양이라 하여 음을 앞에 세우는 것도 그러한 예의 한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 사상은 기본적으로 땅의 사상이며 모성의 문화라는 것이지요.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것이지요.

 

 

 

 일례로 건위천괘(乾爲天掛)의 상구 효사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警戒)입니다. 초로 만들어진 날개를 달고 있는 이카루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자 태양열에 녹아서 추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논의를 불필요하게 확대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 원적암에 있을 때 자신의 영정(影幀)에 쓴 시입니다.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80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공자의 인간 이해를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의 인권 사상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 그러나 과거의 담론을 과거의 가치 인식으로 어떻게 현대인이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과거의 사건을 그 당시의 가치 인식으로 평가하는 것이 오늘날에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단 말인가?)

 

 

 

 미래로부터 시간이 다가온다는 생각은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고도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마치 미래에서 자란 나무를 현재의 땅에 이식(移植)하려는 생각만큼이나 도착된 것이다. 시간을 굳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강물이 흘러가는 방향은 반대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형식에 담기는 실재의 변화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선 대부분의 새천년 담론이 이끌어내는 결론이 그렇다. 새천년 담론은 다가오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결론으로 이끌어낸다. 이러한 미래 담론의 기본 구도는 두 가지 점에서 오류를 낳는다.

 첫째, 미래의 어떤 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이다. 그리고 둘째, 그 미래는 현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사유(思惟)의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墮落論)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미인은 대체로 자신에 대한 칭찬을 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칭찬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는 글자 그대로 양() 자와 대() 자의 회의(會意)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생활의 물질적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과 가죽은 입고 신고, 그 기름은 연료로 사용하고, 그 뼈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熟知性)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결국 변화 그 자체에 탐닉하는 것이 상품미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가 한 말을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말을 더듬지 않겠는가하는 것입니다.

 

 

 

 한 시간쯤 책을 읽고 나서는 반드시 30분 정도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면서 머릿속에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어둡지 않게 된다는 것이 할아버님의 해석이었습니다.

 

 

 

 「학이」편에 학즉불고(不固)란 구절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거백옥은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에 나아가고 나라에 도가 djqtdmauis 자신의 재능을 말아서 품에 감추었다.

 

 

 

 사실 진정한 지란 무지(無知)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다수로서의 민중은 존재하는 법이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는 사실입니다.

 

 

 

 승객들은 평균 열 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群集)일 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무지무욕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이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공리입니다.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고요함은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는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맑고 고요함이 천하의 올바름이다.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Progress is Simplification)라고 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삶의 지출(支出)이 노동이지요.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어쨌든 선생들은 결과적으로 자기를 배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지요.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지혜란 무엇인가?”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를 여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고 자물쇠를 채운다. 그러나 큰 도적은 궤를 훔칠 때 통째로 둘러메고 가거나 주머니째 들고 가면서 끈이나 자물쇠가 튼튼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속의 지혜란 이처럼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것이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될 것이고, 땅속에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의 밥이 될 것이다. (장례를 후히 지내는 것은) 한쪽 것을 빼앗아 다른 쪽에다 주어 편을 드는 것일 뿐이다. 인지(人知)라는 불공평한 측도로 사물을 공평하게 하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정한 공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유가란 예를 번잡하게 하여 귀족들에게 기생하는 무리라는 것이 묵자의 유가관(儒家觀)입니다.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겸애는 별애(別愛)의 반대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겸애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고,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을 막았다. 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비가 내려서 마을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지기가 그를 들이지 않았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그림은 우선 그림이라는 의미에 충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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