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2009년 봄
처서
아버지 이제 가입시더
술을 껴입은 채 쓰러진 아버지
아버지 쓰러뜨린 무슨 짐을 제가 다 질 듯
소년 상주가 운다
비죽비죽 비가 솔잎을 씹으니
나무마다 쓰린 날
앞물 뒷물 다 비운 채
닻을 내린 산등성
영락 공원묘지
저승에서 밟을 영원한 낙이란 어떤 것인가
아부지 이제 가입시더
갈 데도 없을 듯한 이승
찬 바닥을 쪼고 있는
까치 두 마리.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보면 변한의 삶이 그려져 있다. 오곡과 벼를 기르고 누에를 기르고 비단을 짜고 노래와 춤과 술마시기를 좋아하고 몸에 문신을 새기고 보병전투에 능하며 부엌이 모두 집의 서쪽에 있고 의복은 청결하고 머리를 길게 길렀고, 폭이 넓은 베로 옷을 지어입고 법도와 풍속이 몹시 엄준했다고 한다. 그 후 다량의 철기문화가 유입된 가야는 고구려, 신라, 백제와는 다른 독립된 역사와 문화를 600년이나 누렸다.
국화꽃 그늘과 쥐수염붓
국화꽃 그늘이 분(盆)마다 쌓여 있는 걸 내심 아까워하고 있었다
하루는 쥐수염으로 만든 붓으로 그늘을 쓸어 담다가
저녁 무렵 담 너머 지나가던 노인 두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이 국화꽃 그늘을 얼마를 주면 팔 수 있느냐고 물었다
또 한 사람은 붓을 팔 의향이 없냐고 흥정을 붙였다
나는 다만 백년을 쓸어 모아도 채 한 홉을 모을 수 없는 국화꽃 그늘과
쥐의 수염과 흰 토끼털을 섞어 만든 붓의 내력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대신 구워서 말려놓은 박쥐 몇 마리와 박쥐의 똥 한 홉,
게으른 개의 귓속에만 숨어 사는 잘 마른 일곱 마리의 파리,
입동 무렵 해뜨기 전에 채취한 뽕잎 일백이십 장, 그리고
술에 담가 놓았다가 볶아 가루로 만든 깽깽이풀뿌리를 내어놓았다
두 노인은 그것들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자신들은 약재상(藥材商)이 아니라 했다
그리고는 바삭바삭 소리가 날 것 같은 국화꽃 그늘에 귀를 대보고
쥐수염붓을 오래 만지작거리더니 가을볕처럼 총총 사라졌다
그렇게 옛적 시인들이 나를 슬그머니 찾아온 적이 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 혹은 ‘시를 창작하는 사람’을 뜻하지만, 그 창작물을 통해 변화∙발전하는 존재이다.
좋은 시든 나쁜 시든 ‘이미’ 창작한 한 편의 시에는 ‘앞으로’ 창작할 시의 방향과 원리가 다 들어 있다.
그래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순간, 시인은 자신의 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아갈 운명에 처하게 된다.
시는 실용과 경제의 반대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무엇이다. 때로는 어슬렁거림이고, 때로는 삐딱함이고, 때로는 게으름이고, 때로는 어영부영이고, 때로는 하릴없음인 것이다.
종교가 진리의 절정에 도달한 정신의 영역이라면 문학은 진리의 위기를 포착하는 풍향계여야 한다. 종교와 문학이 손쉽게 화해하면 둘 다 망한다.
그 어깃장, 그 버티는 안간힘, 그 불화의 순간에 가까스로, 시는 태어난다.
시인이 명징하게 말을 한다고 해서 독자에게 언어가 다 명징하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말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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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공양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구절초의 북쪽
흔들리는 몇송이 구절초 옆에
쪼그리고 앉아본 적 있는가?
흔들리기는 싫어, 싫어, 하다가
아주 한없이 가늘어진 위쪽부터 떨리는 것
본 적 있는가? 그러다가 꽃송이가 좌우로 흔들릴 때
그 사이에 생기는 쪽방에 가을햇빛이
잠깐씩 세들어 살다가 떠나는 것 보았는가?
구절초, 안고 살아가기엔 너무 무거워
가까스로 땅에 내려놓은 그늘이
하나같이 목을 길게 빼고, 하나같이 북쪽으로
섧도록 엷게 뻗어 있는 것을 보았는가?
구절초의 사무치는 북쪽을 보았는가?
갈대
겨울 강, 그 두꺼운
얼음종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저 마른 붓은 일획이 없다
발목까지 강줄기를 끌어올린 다음에라야
붓을 꺾지마는, 초록 위에 어찌 초록을 덧대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일획도 없이
강물을 찍고 있을 것이지마는,
오죽하면 붓대 사이로 새가 날고
바람이 둥지를 틀겠는가마는, 무릇
문장은 마른 붓 같아야 한다고
그 누가 일필(一筆)도 없이 휘지(揮之)하는가
서걱서걱, 얼음종이 밑에 손을 넣고
물고기비늘에 먹을 갈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지키고 지탱하기 위해서 그 집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들은 단 둘이었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한자말 여행을 순우리말로 풀면 나그네짓 또는 나그네질이 될 것이다.
에덴의 동쪽
- 드라마 5
권혁웅
최(崔)는 두 개의 인생을 살았다 중앙선을 넘어온 트럭이 그를 횡단한 후에 이전 최의 인생은 납작해졌다 김밥처럼 검고 둥근 차바퀴가 그의 몸을 거듭해서 말아갔다
최의 목숨이 낙원에서 애면글면 망설일 때에, 지나가던 조(趙)가 그를 주워서 펴주었다 최의 기억은 김발처럼 가늘게 토막이 났다 거기 붙은 밥알처럼 어떤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으나,
그 얼굴이 한(韓)임을 알 도리가 없었다 도리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최는 이미 강을 건넌 것이다 터진 김밥처럼 한의 얼굴은 그에게서 새어나간 것이다
한은 백방으로 최를 찾아다녔으나 도로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로를 벗어난 그녀는 대장균처럼 쏟아져 내린 폭설에 길을 잃고, 지나가던 최에게 구원을 받게 된다
한이 최를 올려다보았을 때, 그는 조의 남편이 되어 있었다 김밥이 쉬어터질 때의 심정이 이랬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데! 아직 그이와 소풍 가기도 전인데!
순정이라면 최의 상태는 치매 환자와 비슷해진다 전생과 이생을, 낙원의 서쪽과 동쪽을 왕복하는 것이다 도로에 눕고 싶은 남자들을 어루만지며, 살아봤더니 그냥 그렇더라, 달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치정이라면 얘기는 복잡해진다 트럭은 뺑소니였고 사주는 조가 했으며 최는 가출했고 한에게는 동행이 있었더라는…… 일단 저지르면, 출가와 가출을 혼동하면, 그에겐
어마어마한 소송이 뒤따라온다 서류를 가득 실은 트럭이 중앙선을 넘어온다 엎질러진 대장균처럼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때가 되면 얘기는 상투적인 문장이나 상한 김밥 한두 줄로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누에의 잠
누에가 입으로 실을 토해 집을 짓고 있다
볕 좋은 아랫목에 앉아 나는 누에를 에워싼 실을 한 가닥씩 뽑아낸다
돌아누워 뿜어내는 누에의 실은 둥글게 말린 길을 만들고
나는 그 길을 한없이 따라가다가 문득 뒤가 무서워져
흰 실 한 가닥을 바람에 날려 보내고 마는데
내가 실을 뽑는 동안 살찐 누에는 의심도 없이 순정한 잠이 들지만
이 혼곤한 잠을 뚫고 어느 날 날아오른다는 날개의 날들을 나는 믿을 수가 없다
톡톡 끊어지는 실을 한 올씩 뽑을 때에도 누에는 꼼짝 않고 실을 뿜는다
소나기 소리를 내며 뽕잎을 먹어치우던 누에는
몸을 불리며 몇 번의 잠을 건너는 것인데
끝내는 저만의 둥근 방에 들어 오그라든 잠에 갇히는 것인데
한 번 닫히면 그 잠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아 나는
자꾸만 흰 실을 훔쳐내는 것이다
뽑아도 뽑아내도 사방은 온통 흰 빛의 고요뿐, 둥글게 닫히는 그 빛이 서러워
나는 슬며시 안방을 나오고 마는데 문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는 누에,
내게로 몸을 돌리며 흰 실은 몇 개나 되느냐 묻는다
비단을 짤 수도 없는 실, 누가 폐경을 지난 누에의 몸에서
분칠한 날개가 돋아난다고 말을 하는가
일생을 구물거리며 기어온 초승달 하나가
초저녁 창 밖에서 어느새 지고 있다
소설을 지나다
은행 잎 지고 겨울비 오는 날
일 피해 사람 피해 찾은 시골집
첫서리 오고, 김장하고 마늘 심은 후
서리태 타작한, 이맘 때
바깥 풍경은 나만큼 촌스럽다
누워서도 보기엔 감나무가 최고다
들창에 세 든지 오래된 모습이라 그렇고,
가지가지 종잘종잘,
새 소리를 달고 있어서 더 그렇다
마늘 심은 밭을 지나는 바람 같은 소리
매점매석 했다 해도
눈감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감나무 그늘에서 자라 감 먹고 살아 온 그 소리는
전대 풀고 나온 나를 창문 앞에 서게 했다
이파리 다 떨군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철물점 연탄난로를 쬐던 거칠고 곱은 손들이 보인다
먹고 사는 일에, 온전히 한 해를 다 보낸 발자국소리 들린다
보일러 소리, 냉장고 소리,
창문을 치고 두드리는 계곡 바람 거친데
풍경은 거짓말처럼 소설(小雪) 무렵을 지나고 있다
철물점 여자
예외 없다 사람 손 가야 비로소 제값 하는
무수한 연장들 틈새에서 시 쓰는 여자가 있다
새벽 여섯시부터 밤 여덟시까지
못 팔아야 살지만 못 팔아도 사는 여자
십 년 전 마음에 심은 작심(作心)이라는 볼트 하나
너트로 한 바퀴 더 조여야 하는
사월은 성수기
작업 현장에 연장이 필요하듯
여자에겐 시간이 절실하다
시를 쓰겠다고 한 시간 일찍 나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를
고요 속 새벽이 빨아들인다
뒤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흙집을 개조한 철물점 기와지붕엔
아직도 이끼가 끼어 있어
늘 기역자로 만나야 하는 새소리는
어긋나 포개진 기왓장 틈새에 알 낳고 품었을 그 시간들,
지난 십 년을 생각나게 하는데
용마루 위 일가 이룬 새들의 울음소리에
자꾸만 착해지는 여자
지명 따라 지은 이름 ‘대강 철물점’
간판 너머엔
적당히 보리밭 흔드는 바람이 불고
멋대로 떨어지는 감꽃도 싱싱하지만
개줄 하나 팔고 앉으면 받침 하나 빠지고
물통 하나 팔고 앉으면 단어 하나 달아난다
오늘도
철물처럼 무거운 시
플라스틱 약수통처럼 가볍고 싶은 시
우체부는 더 빨리 걷지 않는다
우체부가 지나가니까 들국이 소담하니 핀다
개똥지빠귀가 우는가 하면
어느 담 밑에 늦은 과꽃은 세 번을 벨을 가장해 울기도 한다
거 우체부 아저씨 조금만 빨리 걸으시면 안 되나
늘 그 걸음이다
기쁜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항시 그 걸음이다
아예 자전거는 옆구리에 모시고 다니신다
염소에게 글을 가르치시나
담배 한 대 더 태우고야 엉덩이를 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나도 기다림이 된 지 오래다
오늘은 유난히 행낭이 불룩하시다
하, 새끼 기러기 몇 마리 목을 내밀고 있다
그렇다고 걸음이 더 빨라지지 않는다
그 걸음으로 저기 저 달까지 무난히 갈 것을 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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