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정호승, 창비, 2008(초판 8)

 

 

 

 

 

 

스테인드글라스

 

늦은 오후

성당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높은 창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이

내 앞에 눈부시다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나 아직 알 수 없으나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각조각난 유리로 만들어진 까닭은

이제 알겠다

내가 산산조각난 까닭도

이제 알겠다

 

 

 

 

 

 

장의차에 실려가는 꽃

 

모가지가 잘려도 꽃은 꽃이다

싹둑싹둑 모가지가 잘린 꽃들끼리 모여

봄이 오는 고속도로를 끌어안고 운다

인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만큼

더한 아름다움은 없다고

장의차 한쪽 구석에 앉아 울며 가는 꽃들

서로 쓰다듬고 껴안고 뺨 부비다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마냥 졸고 있는

상주들을 대신해서 울음을 터뜨린다

아름다운 곡비(哭婢)

 

 

 

 

 

 

 

허물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린 매미를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허물이 없으면 매미의 노래도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허물의 힘에 놀라

슬며시 손을 떼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보았다

팔순의 어머니가 무릎을 곧추세우고 걸레가 되어 마루를 닦는다

어머니는 나의 허물이다

어머니가 안간힘을 쓰며 아직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까닭은

아들이라는 매미 때문이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산사에 오르다가

흘러가는 물에 손을 씻는다

물을 가득 움켜쥐고 계곡 아래로

더러운 내 손이 떠내려간다

나는 내 손을 건지려고 급히 뛰어가다가

그만 소나무 뿌리에 걸려 나동그라진다

떠내려가면서도 기어이 물을 가득 움켜쥔

저놈의 손

저 손을 잡아라

어느 낙엽이 떨어지면서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어느 바위가 굴러가면서 땅을 움켜쥐고

어느 밤하늘이 별들을 움켜쥐고

찬란하더냐

 

 

 

 

 

 

집 없는 집

 

집에 들어가도 나는 집이 없다

나는 집 없는 집에서 산다

냉장고가 내 아내고 세탁기가 내 딸이다

어떤 날은 테레비전이 내 아들이고 늙은 소파가 내 어머니다

한번은 냉장고를 보고 여보, 저녁 먹읍시다 하고 말했다가

냉장고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저녁도 먹지 못하고 개미의 집에서 잠이 들었다

싱크대 너머 벽 속에 사는 개미들은 내가 찾아가면 언제든지 문을 열어준다

보이는 족족 손가락 끝으로 눌러 죽였는데도 나를 반긴다

아직도 진정으로 나를 용서해주는 이는 개미뿐이다

나는 대체로 양변기의 말씀은 잘 듣는 편이다

양변기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과거의 똥을 눌 수 없어 너무 고통스럽다

그래서 매일 양변기를 쓰다듬어드리고 물도 채워드린다

물론 수도꼭지의 말씀도 걸레의 말씀도 잘 듣는 편이다

집 없는 집에서는 가끔 꿈 없는 꿈도 꾼다

나의 꿈은 나의 집에서 젊은 산모가 젖가슴을 드러내고 아기에게 젖을 먹였으면 하는 것이다

나의 집은 인간의 젖향기로 가득 채웠으면 하는 것이다

강아지들한테 젖을 빨라는 어미개와 거실에서 함께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집 없는 집이다

집 없는 나의 집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몇 명 외롭게 산다

오늘은 퇴근 후 집 없는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제발 좀 내려오라고 해도 내려오지 않고

아직도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린다

나는 걸레를 들고 천천히 거실을 흥건히 적신 예수의 피를 닦는다

 

 

 

 

 

 

가방

 

나를 가방 속에 구겨넣고 출근할 때가 있다

휴지처럼 나를 구겨넣은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탈 때가 있다

잠시 지하철 선반에 올려졌다가 신문과 함께 바닥에 툭 떨어질 때가 있다

지하철 문틈에 끼여 컥 숨이 막힐 때가 있다

그래도 가방 속에 구겨져 있으면 인간이 되지 않아서 좋다

무엇보다도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남편이 되지 않아서 좋다

아내를 따라 성당에 나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거짓 기도를 하지 않아서 좋다

나는 가방이므로 더 이상 대출상환금을 갚지 않아서 좋다

친구에게 배반당하지도 용서하지도 용서받지도 않아서 좋다

언젠가 출장길에 부안 내소사 요사채 툇마루에 놓여있다가

봄햇살에 깜빡 잠이 들어 잠 속에서도 새소리를 들었을 때

한강대교 아래로 휙 내던져져 물속 깊이깊이 가라앉아가다가

고요히 나를 찾아온 물고기들과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을 때

나는 그 얼마나 행복했던가

나를 가방 속에 코 푼 휴지처럼 구겨넣고 퇴근할 때도 있다

회식이 있는 날은 술 취해 나를 잃어버릴까봐 미리 가방 속에 구겨넣는다

그런 날은 아내는 어디 가고 아들도 보이지 않고

노모만 밤늦도록 빈방에 늙은 텔레비전처럼 쭈그리고 있다가

가방이 와 이래 무겁노 하시면서 나를 받아주신다

 

 

 

 

 

 

 

시각장애인과 함께한 저녁식사 시간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 수 있다는데

불행히도 하루종일 비가 올 때가 있다고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간다고

어느 비오는 날 점자도서관 구내식당에서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나는 왜 불쑥 그런 말을 하고 말았는지

 

제비가 둥지를 틀 때는

지난해 지었던 집에 둥지를 틀지 않고

반드시 그 옆에 새집을 지어 둥지를 튼다고

우리도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둥지를 틀 수 있다고

내가 왜 그런 말을 하면서

열심히 콩나물국을 떠먹고 있었는지

 

내 밥그릇에 앉았던 파리 한 마리가

밥알을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숟가락질을 하는

시각장애인의 밥그릇에 앉으려고 해서

내가 손으로 파리를 멀리 쫓았으면 쫓았지

왜 그런 말을 하며

질겅질겅 밥을 씹어먹고 있었는지

 

 

 

 

 

 

 

내 얼굴에 똥을 싼 갈매기에게

 

고맙다 나도 이제 무인도가 되었구나

저무는 제주바다의 삼각파도가 되었구나

고맙다 내 죄가 나를 용서하는구나

거듭된 실패가 사랑이구나

느닷없이 내 얼굴에 똥을 갈기고

피식 웃으면서 낙조 속으로 날아가는 차귀도의 갈매기여

나도 이제 선착장 건조대에 널린 한치가 되어

더 이상 인생을 미워하며 잠들이 않으리니

나도 한번 하늘에서 똥을 누게 해다오

해지는 수평선 위를 홀로 걷게 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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