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로 만든 사람들, 살바도르 플라센시아, 이레, 2007(초판3)

 

 

 

 

 

 우리 아기는 명상을 하는 중이야. 명상을 하면서 태어났어. 처음에는 뇌사 상태인 줄 알았지 뭐야…”

 

 

 

 왁스와 첫사랑은 항상 균형을 흐트러뜨린다는 설이 맞는 셈이었다.

 

 

 

 그는 멀리 떠난 남자들이 전화선과 케이블이 미친듯이 타래에서 풀려 나가다가 너무 팽팽해져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탁 끊어져서 되튀는 바람에 길을 따라 늘어선 전봇대들이 몽땅 무너지는 것을 느낄 때 하는 약속들을 모두 했다.

 

 

 

 돈 빅토리아노는 고해할 때만 빼고는 누구에게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아내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을까 봐 두려워서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키노네스는 나탈리아를 사랑한다고 죽 생각해왔지만, 일광욕과 열대의 왕새우 맛, 따듯한 해변의 백사장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닥치자 비로소 사랑의 대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도, 그의 기억을 식민지로 만든 백인 사내 생각도 않게 될 것이다. 자신의 제국주의를 온 사방에 퍼뜨린 놈, 그녀의 몸 전체에, 가슴과 배에 온통 제국주의를 흩뿌리고, 입술을, 목구멍을 제국주의로 뒤덮고, 식도와 내장까지 제국주의로 덮어씌운 놈.

 

 

 

 그녀는 보일러에 작은 나무토막을 하나 던져넣고 수도꼭지에서 따듯한 물이 나오자 낮은 목소리로 비데의 기도를 읊조렸다. 제 털에서 이 남자를 씻어내겠나이다, 저에게서 이 남자를 씻어내겠나이다…”

 

 

 

 애인이 과거의 상대 얘기 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여전히 과거를 정리했고 상처를 치유했으며, 곪은 자리도 전혀 없고 남은 사랑의 불씨를 다시 일으킬 거리도 없다는 증거를 찾아다니는 법이다.

 

 

 

 명랑함은 행복의 가장 슬픈 형태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행복은 행복이었다.

 

 

 

 모눈종이 위에서 모든 다각형 중에서도 가장 슬픈 것을 발견했다.

 

 

 

 그는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였다. 토성은 그녀의 우편번호도, 아파트 주소도, 그녀가 간 도시의 이름도 몰랐다. 그는 봉투에 그녀의 이름을 적었다. 이름 아래 그녀가 있을 법한 장소를 묘사했다. 강이 흐르는 도시, 산달바람이 부는 거리, 계단이 있는 아파트, 차양이 달린 방들.

 

 

 

 꼬마 메르세드는 토성의 존재를 감지하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토성뿐 아니라 책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들, 문장을 따라 아빠의 방으로, 침대로 들어와 아빠가 피부에 유황성냥을 갖다 대는 모습을 보면서 낄낄대고 자기들끼리 일어나, 늙은이. 계집애 하나 갖고 뭘 그래. 같은 소리를 지껄였을지도 모를 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연인들의 입술, 그들의 입을 째놓은 흉터에만 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연인 메르세드 데 파펠, 사랑을 받았던 여자의 기록이었고, 그녀를 만짐으로써 느낀 고통의 기록이었다. 메르세드 데 파펠은 흉터에 남은 흔적을 신중하게 다루었다.

 

 

 

 그들이 돌아오기도 하니까요. 어떤 여자들은 뒤에 핏자국과 붕대 조각을 남기며 무릎으로 기어서 자갈돌과 아스팔트에 살을 다 긁히면서 돌아와 마침내 옛 연인의 차갑고 매끄러운 스페인식 타일에 닿기도 하지요.

 어떤 여자들은 훨씬 쉬운 길을 택합니다. 집까지 다 와서 무릎을 꿇고, 사포로 무릎을 문질러 먼 거리를 온 척하는 거지요. 어느 쪽이든 긁힌 생채기와 상처를 보듬어주어야 합니다.

 

 

 

 나는 그녀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오는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붕대를 감느라 잠깐 발을 멈추었지만 결국은 집 현관에 와 닿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지막 코스를 되도록 부드럽고 푹신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음날 꼬마 메르세드가 잠들어 있는 동안, 마당의 흙먼지를 쓸고, 잡초를 뽑고, 잔디 씨를 뿌렸다. 잔디를 키우되 너무 길지 않게, 메르세드의 무릎이 흙에 닿지 않을 만큼만 키웠다. 그리고 계단에는 발포 패드를 깔고 부드러운 깔개로 덮었다.

 

 

 

 여러 사람들을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사람들이 너를 안다고 하더라. 나도 알고 있다는 거야. 그이들 말로는 161페이지에서부터 나를 알게 되었대. 그들한테 난 꿀벌이고 네가 추울 때 잠자리 해주는 상대더라. 또 자포자기에 빠져 비데 위에 걸터앉은 찐드기 같은 여자고, 우리가 섹스를 한 방식이며 체위까지 다 알더라고, 아직 나를 만져본 적도 없으면서 내 거기 감촉까지 안다는 거야.

 

 

 

 주님은 우리에게 가서 자유의 몸이 되어 악을 행하든 선을 행하든 뜻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처음부터 의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하게 되어 있다.

 

 

 

 벌 말고 다른 생물, 내가 그리워하지 않는 생물도 있다. 너의 다리 사이에 있는 수줍은 달팽이 꿀도 못 만들고 끈적이는 비단실 자국만 남기는 것.

 

 

 

 그들은 남쪽을 향해 토성이 좇을 수 있는 발자국을 전혀 남기지 않은 채 페이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 슬픔에는 어떤 속편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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