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과 들판의 별, 황병승, 문학과지성사, 2008(초판4)

 

 

 

 

 

멜랑콜리호두파이

 

 

배가 고파서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꿈속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 하나 때문에

무지개 언덕을 찾아가는 여행이 어색해졌다

 

나비야 나비야 누군가 창밖에서 나비를 애타게 부른다

나는 야옹 야아옹, 여기 있다고, 이불 속에 숨어

나도 모르게 울었다

그러는 내가 금세 한심해져서 나비는 나비지 나비가 무슨 고양이람, 괜히 창문만 소리 나게 닫았지

 

압정에, 작고 녹슨 압정에 찔려 파상풍에 걸리고

팔을 절단하게 되면, 기분이 나쁠까

 

느린 음악에 찌들어 사는 날들

머리빗, 단추 한 알, 오래된 엽서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이 괜스레 미워져서

뒷마당에 꾹꾹 묻었다 눈 내리고 바람 불면

언젠가 그 작은 무덤에서 꼬챙이 같은 원망들이 이리저리 자라

내 두 눈알을 후벼주었으면.

 

해질 녘, 어디든 퍼질러 앉는 저 구름들도 싫어

오늘은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를 샀다

입 안 가득 미끄러지는 달고 맛 좋은 호두파이,

뱃속 저 밑바닥으로 툭 떨어질 때

어두운 부엌 한편에서 누군가, 억지로,

사랑해…… 하고 말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밤

 

 

알코홀릭alcoholic, 그것은 연약한 한 존재가 자신을 열정적으로 위로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빠질 때까지, 더 나빠질 때까지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존재들, 끝없이 질문하는 존재들과도 같이, 지구 바깥에, 허공에 집을 짓는 사람들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때는 나도 너처럼 말수가 적었고

감당할 수 없는 질문엔 얼굴을 붉혔다

험한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고 가끔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즐기는 편은 아니었어……대신 호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땐

꿈꾸는 약을 샀지 매일 밤 계속될 것만 같은 아름다운 꿈들

돌이켜보면 조금은 지루하기도 했던 것 같군

아름답다는 건 때로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드는 어떤 결심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종교를 갖는다는 것, 찬물로 세수를 해라 이 엄마가 죽도록 때려줄 테다

 

공허해질 때까지, 더없이 공허해질 때까지

 

언젠가는 밤새도록 책이란 것도 읽었지

너처럼 책 속에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고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짐승처럼

종이 속에 묻혀 조금 울기도 했지

그래 손등은 보드라웠고 뺨은 희었다

! 뺨이 참 희었는데……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그때도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몰랐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저 언제나 다그치고 몰아세우는

내가 나의 부모였으니까

 

웨이트리스waitress, 네가 먹을 음식과 네가 먹다 남긴 음식을 치워주겠다는 뜻이다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물고기의 노래

 

 

어항 속 물고기는 듣는다

창가에 흐르는 새의 노래와

안녕하시오 물고기 선생

새의 인사를

 

물고기는 답례한다

아가미를 움찔거리며

물 풍선 두 개.

 

어항 속 물고기는 듣는다

창가에 넘쳐흐르는 새의 노래와

당신도 노래를 아시오?

새의 질문을

물고기는 듣는다

수고하시오 물고기 선생

새의 작별을

 

물고기도 답례한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물 풍선 두 개.

 

 

 

 

 

 

 

멀고 춥고 무섭다*

 

우리는 모두 음악가들인데, 술에 거나하게 취해 이러저리 혀 꼬부라진 말들이 오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음악가 ㅁ과 어딘가 몹시 답답한 인상을 풍기는, 낯선 사내 하나가 따라 들어오는 것이었다

 

날씨는 덥고 방은 비좁고 올라오는 취기 속에서 더 이상 선풍기의 바람이 흐르는 땀을 식혀주지 못하는 새벽, 술 취한 목소리로 애교 섞인 노래 한 곡 불러줄 여자 하나 없이, 우리는 곤드레만드레 취해 빌어먹을 개새끼 호모 딴따라 계집애 같은 씨발놈, 그러고 있는데

 

구부정한 어깨, 헝클어진 머리, 음악가 ㅁ을 따라 들어온, 어딘가 몹시도 사람을 피곤하게 할 것만 같은 낯빛의 사내는, 나 시인이요 시인 아무개요, 그러는 거다 (시인은 무슨 쥐똥같이……) 술 맛이 떨어져서 우리는 딴청을 피워댔고, 목소리 큰 음악가 ㅈ이 일어나, 어이! 미음, 비읍, 시옷 이 개새끼들아 음악이 장난이냐! 소리치며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음악가 ㅁ을 노려보았고, 시인 아무개는 인상을 구기며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것이었다

 

 담배 연기와 악취, 열기로 방 안은 숨이 막혔고 어쨌거나 우리는 더 이상 마시기가 싫다! 그러고 있는데, 한쪽에서 음악가 ㅁ과 시인 아무개가 계속해서 챙 챙 챙 술잔을 부딪쳤고 음악가 ㅂ 역시 그런 음악가 ㅁ이 못마땅했는지, 씨발놈 일찍 일찍 좀 다닐 것이지, 하며 비틀비틀 일어나 방문을 열어젖혔고, 음악가 ㄱ이 뒤따라 일어섰고, 음악가 ㅈ이 재킷을 집어 드는 순간,   

 

 어딘가 몹시도 불안해 보이는, 꼬일 대로 꼬여서, 도무지 내 인생 왜 이래? 하는 표정의, 지저분한 턱수염, 충혈된 눈알의 시인 아무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문짝을 걷어차며, 다 대가리 박어! 그러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음악가들인데, 지지리 궁상의 끝에서 도무지 쓸쓸하게 취해버렸는데 왜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난 시인 나부랭이가 우리에게 대가리 어쩌고 하는 것일까.

그때 당황한 음악가 ㅅ이 술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음악가 ㅇ을 부랴부랴 발로 걷어차며, 야 대가리 박지 마 일어나 대가리 박지 마, 얼떨결에 헛소리를 해댔고 시인 아무개 자식은 낄낄거리며, 이 새끼 봐라 이거 아주 맛이 갔구만, 또 그러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음악가들인데 말이다. 장기 공연을 끝내고 허탈한 심정으로, 여자 하나 없이 취할 대로 취해버렸는데, , 뭣 때문에, 간밤에 잠을 설쳐 피곤해 죽을 지경인데, 대체 왜, ! …… 담배 연기와 악취, 열기에 쉴 새 없이 진땀이 흐르는 이 좁아터진 골방에서, 우리는 아침이 오도록 음악과 시를 섞어야 했는가, 말이다

 

주먹은 까졌고, 날은 밝았다

 

 

* 어어부 밴드의 노래 제목.

 

 

 

 

 

 

 

 

아빠

 

 

선생님,

이곳에선 모두 죽었죠

믿어서 죽고

못 믿어서 죽고

 

아빠 하고 부르면

우선 배가 고프고

아빠 하고 부르면

아빠는 없고

아빠라는 믿음으로

개 돼지를 잡아먹는

먼 나라의 아빠 숭배자들처럼

먹어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아빠를……

 

선생님,

당신에겐 아빠가 있죠

당신의 아이들에게도 아빠가 있어요

 

아빠, 좋은 탁자다

 

그 위에 올라가

타닥 타닥 탭 댄스를 추고

노래를 부르고

당신의 아이들은 먼 나라의 배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위에서 사랑을 나누죠,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 그러한 믿음으로

 

등이 배기고 아플 텐데,

우리의 아빠는

아빠 하고 부르면

언제나 울상이고

아빠 하고 부르면

누가 먼저 먹어 치우지는 않을까,

언제나 걱정이 앞서는……

 

선생님,

이곳에선 모두 죽였죠

밤새도록 들락거리며

믿어서 죽이고

또 못 믿어서 죽이고.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2층 사는 남자가 창문을 부서져라 닫는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는지 보려고

 

여자가 다시 창문을 소리 나게 열어젖힌다, 그것이 잘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으니까

 

서로를 밀쳐내지 못해 안달을 하면서도 왜 악착같이 붙어사는 걸까, 더 큰 집으로 이사 가려고

 

바퀴벌레 시궁쥐 사마귀 뱀 지렁이 이 친구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움받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파티에 초대받은 적이 없어서

 

아줌아 아저씨들은 야 야 됐어그런다, 조금 더 살았다고

 

그러면 다리에 난간은 뭐 하러 있나 입을 꾹 다물고 죽은 노인네에게 밥상은 왜 차려주나 그런게 위안이 되지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빵 주세요 빵 먹고 싶습니다 배고픈 개들이 주춤 주춤 늙어가는 저녁

 

춤추는 언니들, 추는 수밖에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Sick Fuck Sick Fuck

 

 

엔초 페라리를 타고 터널을 놀라게 하고 싶다 늙은이들이 울어서 짜증이 나겠지

 

태어나는 것처럼 나쁜 짓은 없다 친밀감 그것은 변장한 악에 불과하다 나는 아가들을 악질이라 부른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서둘러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나체가 되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나는 외투의 단추조차 풀지 않은 채로 그녀의 알몸을 내려다보았고 잘 자라고 말했다 잘 자…… 그러자 그녀가 담요를 끌어와 가슴과 아랫도리를 감추며 나와 자기 자신, 두 사람에게 동시에 배반당한 사람처럼 말했다

 그래, 좋아

 

내 거시기에선 언제나 식초 냄새가 난다 나는 그 냄새를 고스란히 느끼며 극장 쪽으로 걸었다 길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인 반달 얼굴을 만났다 반달 얼굴이 내게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나중에 한잔,을 끝으로 돌아서며 나는 그가 모든 면에서 별 볼일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자네는 만 레이 필름을 본 적이 있나?

-         그렇습니다 선생님

-         그렇다면 자네의 필름은 만 레이를 베낀 거로군

-         그렇습니다 선생님

-         부끄러운 줄 알게

-         그렇습니다 선생님 저는 제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고 싶었습니다

 

-         집에 불가사리를 가져오지 말아요

-         왜지?

-         그건 보시다시피 조금도 예쁘지가 않아

-         집에도 예쁜 건 없어

 

대화가 멈추자 대화가 시작되었다 침묵 속에서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sick fuck sick fuck sick fuck……

 

이집트의 한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못을 먹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못을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먹어야 했다 때때로 아내와 아이들이 그것을 삼키지 못하고 뱉어낼 때면 남자는 상심했고 당겨진 끈처럼 분노가 치밀었다

 

팽팽해진 산책로를 따라 그녀가 울부짖으며 달려나갔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그녀가 나로부터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래,를 말하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그래 그래 그래 그래……

 

위로가 필요하다면 위로가 필요한 것이다 동정을 모르는 촌뜨기 푸주한일지라도 그것 말고는 신음뿐이지

 

그래 그래 그래 그래……

 

죽은 조랑말 냄새

 

언덕 위에 엎드려 하루 종일 풀을 뜯고 싶다 부디 한가롭게 끈이 풀린 것처럼 언덕이 슬슬 검은 배를 보여줄 때까지

 

아이들은 갑자기,의 세계에 살면서 뛰고 달리고 소리친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끄집어내는 순간 그들은 반쯤 죽어버린다

 

사라지는 것, 그렇군, 웃음은 항상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구멍 밖으로

 

-         태어나는 건 역시 안 좋은 거야

-         그러니까…… 너는 그게 싫은 거야?

 

마술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의 삼분의 일을 꿈속에서

 

피가 굳어가지

 

코딱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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