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까치, 2008(초판 22쇄)
당신이 아주 오래 전부터 적절한 진화의 길을 따라오게 된 것도 행운이었지만, 당신의 가정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기적이었다. 지구에 산이나 강이나 바다가 생기기도 훨씬 전이었던 38억 년 전부터, 당신의 친가와 외가의 선조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짝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고, 자손을 낳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었던 운명과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없음에서 있음(有)이 생겨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때는 없음의 세계였던 곳에서 오늘날의 우주가 생겨난 것은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우주는 수많은 다른 차원의 우주들 중의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고, 대폭발은 어느 곳에서나 늘 일어나고 있는 평범한 일일 수도 있다.
만약 우주의 끝으로 가서 커튼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머리가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좀 실망스럽겠지만, 그런 의문에 대한 대답은 절대 우주의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이기도 하지만, 우주의 끝까지 가는 데에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은 아니다. 직선을 따라서 무한히 오래 가더라도 절대 우주의 끝에 도달할 수가 없다. 오히려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 이유는 우주가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살펴보게 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맞도록 휘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우주는, 우주가 탄생한 이후로 수십억 년 동안 빛이 진행한 거리만큼만 존재할 뿐이다.
상대적 크기를 고려한 태양계 그림에서, 지구를 팥알 정도로 나타낸다면 목성은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야만 하고, 명왕성은 2.4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야만 한다(더욱이 명왕성은 세균 정도의 크기로 표시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도 없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 켄타우르스를 그런 그림에 나타내려면 1만 6,000킬로미터 바깥에 표시되어야만 한다. 목성을 이 문장 끝에 있는 마침표 정도로 표시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축소하면, 명왕성은 분자 정도의 크기가 되어야 하지만 여전히 10미터 떨어진 곳에 표시되어야만 한다.
그저 밤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하면, 보이는 것이 모두 역사이다. 엄청나게 많은 역사를 볼 수 있다. 밤하늘의 별들은 지금 현재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별빛이 그 별을 떠났던 때에 그곳에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우리가 믿고 따르는 북극성은 지난 1월이나 1854년이나, 아니면 14세기 초에 이미 완전히 타버렸는데도 아직까지 그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뿐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680년 전의 오늘까지는 북극성이 그곳에서 불타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이해하려면, 검은 식탁보를 덮은 식탁 위에 한 줌의 소금을 뿌린 경우를 생각해보면 된다. 흩어진 소금 알갱이들이 은하인 셈이다. 소금이 뿌려진 그런 식탁 1,500개가 월마트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 있거나, 4킬로미터에 걸쳐서 늘어서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식탁 중의 하나에 소금 알갱이 하나를 더 뿌리고 나서, 로버트 에번스 목사에게 그 소금 알갱이를 찾아내도록 하면, 그는 단 번에 새로 더해진 소금 알갱이를 찾아낼 것이다. 그 소금 알갱이가 바로 초신성이다.
에번스에 따르면, “나는 우주공간을 통해서 수백만 년을 지나온 빛이 지구에 도착하는 순간에 누군가가 하늘의 바로 그곳을 쳐다보고 있다가 그것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 정도의 사건이라면 당연히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어야 하겠지요.”
지층에 대한 스미스의 주장은 멸종 이론을 도덕적으로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우선, 하느님이 생물을 가끔씩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멸종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단순히 경솔한 정도가 아니라, 이상할 정도의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E=mc2 이라는 그의 유명한 방적식은… 간단히 말해서 이 식은 질량과 에너지가 동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질량과 에너지는 존재의 두 가지 형식으로, 에너지는 물질을 해방시켜주고, 물질은 준비된 상태로 기다리는 에너지라는 뜻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전혀 달랐다. 1979년에 스노는 “그의 이론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런 이론이 등장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질량을 가지고 있는 모든 물체는 우주의 평면에 약간의 짓눌림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데니스 오버바이가 말했던 것처럼, 우주는 “결국 축 늘어진 매트리스와 같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중력은 결코 결과가 아니다.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에 따르면 중력은 “’힘’이 아니라 휘어진 시공간의 부산물”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중력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행성과 별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비틀림일 뿐이다.”
허블은… 윌슨 산 천문대에 새로 설치된 100인치 후커 망원경과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서 하늘에 있는 (우리 자신이 속한 은하를 제외한) 모든 은하가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더욱이 은하가 멀어져가는 속도와 거리는 명백하게 서로 비례했다. 즉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빨리 멀어져갔다.
뉴턴을 비롯해서 그 이후의 천문학자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보였던 정적인 우주는 그 스스로 수축되어버려야만 했다. 그런 정적인 우주에서 별들이 무한히 타고 있다면 그런 우주는 엄청나게 뜨거워져야 할 것이고, 특히 인간과 같은 존재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졌어야만 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팽창하는 우주의 개념은 그런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주었다.
칼텍의 위대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만약 과학의 역사를 한 줄로 줄여서 표현한다면 “모든 것이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원자들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가 죽고 나면 그 원소들은 모두 재활용된다. 그래서 우리 몸 속에 있는 원자들 중의 상당수는 한때 셰익스피어의 몸 속에 있었을 수도 있다.
원자들이 대부분 빈 공간으로 되어 있다면, 결국 우리가 주변에서 경험하는 단단함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게 된다.
진짜 세상에서 두 개의 물체가 가까워지면 실제로 두 개의 단단한 당구공처럼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티머시 페리스는 “그런 것이 아니라, 두 공의 음전하 때문에 생긴 힘장이 서로 반발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입자들이 전하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두 공은 은하들처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서로 겹쳐서 지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은 실제로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1옹스트롬(1억 분의 1센티미터) 정도의 높이에 떠 있는 셈이다.
가속기에서는 전자가 1초에 6.4킬로미터의 터널을 4만7,000바퀴나 돌게 된다. 너무 흥분한 과학자들이 실수를 해서, 블랙 홀을 만들거나 또는 이론적으로는 다른 아원자 입자들에 작용하면 그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게 된다는 “스트레인지 쿼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입자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잘 빠져나가기도 한다. 매초 지구에는 1조 개의 1조 배의 1만 배의 작고, 질량도 거의 없는 중성미자들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거의 모두가 지구는 물론이고 그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아무 일 없이 통과해버린다.
대륙들은 연못에 떠 있는 나뭇잎처럼 떠다니고 있다. 지구 위치 파악 시스템(GPS) 덕분에 우리는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달팽이와 같은 속도로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사람의 평균 일생 동안 대략 2미터 정도씩 멀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수명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지구본에서 지금 볼 수 있는 모습은 지구 역사의 0.1퍼센트에 해당하는 기간에 만들어진 대륙들의 스냅 사진에 불과할 뿐이다.
우주적인 속도로 날아오는 소행성이나 혜성이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면,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 앞쪽에 있는 공기가 비켜날 틈이 없기 때문에 자전거 펌프 속에서처럼 압축이 된다. 그런 펌프를 써본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공기가 압축되면 곧바로 뜨거워진다. 그래서 대기에 진입한 소행성의 앞쪽에 있는 공기의 온도는 태양 표면 온도의 열 배에 가까운 6만 K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운석이 지나가는 길에 있는 사람, 집, 공장, 자동차를 비롯한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불 속에 던져진 셀로판 판처럼 찌그러져버린다.
아직도 그 이유가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대략 수심 30미터 이하에서는 질소가 강한 독성을 나타내게 된다. 질소에 중독된 잠수부들은, 자신의 공기 호수를 지나가는 물고기에게 주어버리거나, 그 자리에서 쉬면서 담배를 피우고 싶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기에 의한 감속 효과가 없다면, 빗방울마저도 우리를 기절시켜버리게 된다.
바람은 단순히 공기가 균형을 회복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공기는 언제나 고기압 지역에서 저기압 지역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화성의 지도가 우리의 바다 밑 지도보다 더 나을 정도이다.
1994년에 태평양에서 태풍을 만난 한국의 화물선에서 아이스하키용 장갑 3만 4,000켤레가 바다로 떨어져버렸다. 그 장갑은 벤쿠버에서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곳으로 떠밀려갔다. 그 덕분에 해양학자들은 작은 해류들에 대해서 과거 어느 때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산소를 사용하지 않는 무산소성 생물의 세계에서 산소는 독성이 매우 강하다. 실제로 우리의 백혈구는 산소를 이용해서 박테리아를 죽인다. 산소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산소가 독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게 들리겠지만,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산소를 활용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체들에게 산소는 두려운 존재이다.
애튼버러에 따르면, “지의류는 가장 단순한 수준의 생명이라고 하더라도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감동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생명이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계획과 소망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존재라는 스스로의 믿음을 끊임없이 이용하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지의류에게 생명이란 무엇일까? 지의류가 존재하고 싶어하는 충동은 우리만큼 강하거나 어쩌면 더 강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숲속의 바위에 붙어서 수십 년을 지내야만 한다면 절망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의류는 그렇지 않다. 거의 모든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이끼류는 자신의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고, 어떠한 모욕도 참아낸다. 간단히 말해서 생명은 그저 존재하고 싶어할 뿐이다.
지구의 45억 년 역사에서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최근에 등장한 것인가를 더 잘 이해하려면, 두 팔을 완전히 펴고, 그것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맥피의 「분지와 산맥」에 따르면, 그런 잣대에서 한 손의 손톱 끝에서부터 다른 손의 손목까지가 선캄브리아기에 해당한다. 고등 생물은 모두 손바닥 안에서 생겨났고, “인간의 모든 역사는 손톱 줄로 손톱을 다듬을 때 떨어져나오는 중간 크기의 손톱 부스러기 하나에 들어가버린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필연적으로 생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종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적절한 순간에 있었던 외계로부터의 충돌과 다른 어떤 요행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영국 의학곤충학센터의 존 마운더 박사의 측정에 따르면, 평균 수명에 해당하는 6년 정도 사용한 베개 무게의 10퍼센트 정도는 “벗겨진 피부와 살아 있는 진드기와 죽은 진드기 그리고 진드기의 배설물”이라고 한다(베개 속의 진드기는 당신의 것이다. 여관의 베개는 어떤가 생각해보기 바란다)…. 마운더 박사는 찬물에서 사용하는 세탁기 세제 때문에 진드기가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찬물에 빨래를 하게 되면, 진드기까지 깨끗하게 세탁될 뿐이다.”
가끔 일어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세포가 예정된 순서에 따라 사라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분열되면서 마구 성장하기도 하는데, 그 결과를 암이라고 부른다.
모든 생물은 어떤 의미에서 유전자의 노예들이다. 연어나 거미를 비롯해서 거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물들이 교미과정에서 죽음을 각오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번식을 통해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욕구는 자연에서 가장 강력한 충동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단 하나의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인간도 점진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38억 년에 걸친 케케묵은 조절, 적응, 변이 그리고 행운의 수선 결과일 뿐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초파리나 채소에 훨씬 더 가깝다. 바나나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기능의 거의 절반 정도가 근본적으로는 당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기능과 똑같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진리이고, 그렇다는 사실이 앞으로 증명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곳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선원이나 그 선원의 애완견이 마지막 도도새를 쫓고 있었다. 지루한 육상휴가를 받았던 뱃사람에게 둔하지만 의심할 줄 모르고 잘 뛰지도 못하고 날지도 못하기로 유명한 새는 거부하기 어려운 목표물이었다. 수백만 년 동안의 고립생활을 했던 그 새들은, 예측할 수도 없고 아주 난폭한 인간의 행동에 적응할 준비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도도새의 최후의 순간이 어떤 상황이었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프린키피아」가 있는 세상과 도도새가 없는 세상 중에 어느 것이 먼저였는가도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거의 같은 시기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인간의 성스러우면서도 흉포한 본성을 함께 보여주는 예로 이보다 더 좋은 경우를 찾기 어렵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은 하늘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이면서도 동시에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던 생물을 멸종시키면서도 우리가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스트릭런드의 사려 깊은 지적처럼, 최근까지 살아 있었고 우리가 없었더라면 여전히 살아 있을 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옛날의 바다 괴물이나 쓸데없는 공룡인 사우라포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더 많다.
석기시대가 끝난 후의 멸종들이 실질적으로 하나의 멸종사건인가가 의문이다. 짧게 말해서 인류가 다른 생물들에게 근본적으로 나쁜 존재인가라는 문제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런 존재일 수도 있다. 시카고 대학의 화석학자 데이비드 라우프에 따르면, 생물학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지구의 멸종 속도는 평균 4년마다 한 종이 사라지는 정도라고 한다. 최근의 추정에 의하면, 오늘날 인간에 의한 멸종을 그보다 최대 12만 배나 된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만약 우리의 외로운 우주에서 생명이 어디를 지나왔는가를 기록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감시할 일을 맡길 수 있는 생물을 디자인하려고 한다면, 그런 일을 절대 인간에게 맡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윌슨은 「생명의 다양성」에서 우리의 상황을 더 이상 간결할 수 없는 “하나의 지구, 하나의 실험(One planet, one experiment)”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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