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사랑은 선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후(事後)에 서서히 경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처럼 쓸데 없는 말은 없다. 사랑이 경작되기 이전이라면 그 말은 거짓말이며, 그 이후라면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작은 기쁨이 이룩해내는 엄청난 역할이 놀랍다.
고독은 고독 그것만으로도 가까스로 한 짐일 뿐 무엇을 창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독방은 강한 개인이 창조되는 영토이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많은 것을 읽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이지 사람이란 사과와 같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인생의 반려이며 생활을 통하여 동화•형성되어 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면밀한 선택으로부터 좀 대범해져도 좋을 것이다. ‘부모나 형제를 선택하여 출생하는가’라는 현문 앞에서는 답변이 없어진다.
그저 우직하게 외곬으로 읽어나가는 것만 못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무슨 편법이나 첩경이 없나 자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은 관심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꽃과 나비는 부모가 돌보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답게 자라지 않느냐.”
어린 아들에게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아버님의 자애로 담뿍 적신 저는, 꽃보다 나비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종이 새벽의 정적을 휘저어놓는 틈입자라면, 꼭 스물아홉 맥박마다 한 번씩 울리는 범종은 ‘승고월하문’의 ‘고’처럼, 오히려 적막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같은 방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꼬박 마주 앉아서……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기와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는 차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 ‘차이’에 대한 이해 없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그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허공을 붙들고 일어날 수는 없고 어차피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듯”
징역살이 10년을 넘으면 꿈에도 교도소의 그 거대한 인력(引力)을 벗지 못하고 꿈마저 징역 사는가 봅니다. 우리는 먼저 꿈에서부터 출소해야 하는 이중의 벽 속에 있는 셈이 됩니다.
겨울 밤 단 한 명의 거지가 떨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겐 행복한 밤잠의 권리는 없다던 친구의 글귀를 생각합니다.
저녁에 등불을 켜는 것은 어려운 때 더욱 지혜로워야 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
열한 가족의 받은 징역이 도합 242년, 지금까지 산 햇수가 140년. 한마디로 징역을 오래 산 무기수와 장기수의 방입니다. 응달 쪽과는 내복 한 벌 차(差)라는 양지바른 방이라든가, 창 밖에 벽오동 푸른 잎사귀 사이로 산경(山景)이 아름답다는 점도 물론 좋은 점이지만, 나에게는 역경에서 삶을 개간해온 열 사람의 역사를 만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가슴 뿌듯한 행운입니다.
더러 험한(?) 일을 하기도 하는 징역살이가 조금씩 새로운 나를 개발해줄 때 나는 발 밑에 두꺼운 땅을 느끼듯 든든한 마음이 됩니다.
결국 서도는 그 성격상 토끼의 재능보다는 거북이의 끈기를 연마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글씨의 훌륭함이란 글자의 자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묵 속에 갈아넣은 정성의 양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평가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리라 생각됩니다.
이 닭은 양재공장 사람들이 애지중지 기르고 있는 것입니다. 갇힌 사람들이 또 무엇을 가둔다는 것이 필시 마음 아픈 일일 터인데도, 역시 ‘키운다’는 기쁨은 그 아픔을 갚고도 남는가 봅니다.
더운 코를 풀면서 부지런히 걸어오는 황소가 우리에게 맨 먼저 안겨준 감동은 한마디로 우람한 ‘역동’이었습니다. 꿈틀거리는 힘살과 묵중한 발걸음이 만드는 원시적 생명력은 분명 타이탄이나 8톤 덤프나 ‘위대한 탄생’에는 없는 ‘위대함’이었습니다. 야윈 마음에는 황소 한 마리의 활기를 보듬기에도 가슴 벅찹니다.
이제는 결백하나 얄팍한 노트보다는 다소 지저분하더라도 두툼한 노트를 갖고 싶은 마음입니다.
겨울밤에 잠깐 잠이 깰 때에도 등불처럼 켜져있는 어머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흡사 어릴 때 어머님의 곁에서 재봉틀소리에 잠든 듯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만약 새로움이 완성된 형태로 우리 앞에 던져진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움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감정이 폭발할 듯 팽팽하게 켕겨 있을 때 벽은 이성(理性)의 편을 들기보다는 언제나 감정의 편에 섭니다. 벽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산화(酸化)해버리는 거대한 초두루미입니다. 장기수들이 벽을 무서워하는 이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감정을 이성과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성에 의하여 감정을 억제하도록 하는, 이를테면 이성이라는 포승으로 감정을 묶어버리려는 시도를 종종 목격합니다.
이것은 대립물로서의 이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잘못 파악함으로써 야기된 오류입니다. 감정과 이성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크기가 같아야 하는 두 개의 바퀴입니다. 낮은 이성에는 낮은 감정이, 높은 이성에는 높은 감정이 관계되는 것입니다. 일견 이성에 의하여 감정이 극복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실은 이성으로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높이에 상응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에 의하여 낮은 단계의 감정이 극복되고 있을 따름이라 합니다.
‘관계’는 ‘관점’을 정의합니다.
내 눈에는 다래끼가 났는데, 악어란 놈이 내 다리를 잘라먹었네.
마당에 있는 염소란 놈 풀을 먹여야 할 텐데
솥에는 멧돼지 고기가 끓어넘는구나.
돌절구에 빻다 만 곡식이 말라빠지고 있는데
추장은 나더러 재판받으로 오라네.
게다가 나는 장모님 장례식에도 가야 할 몸.
젠장 바빠 죽겠네.
「악어가 내 다리를 잘라먹었네」(A crocodile has me by the leg) 전문
『아프리카 민요집』
최소한의 ‘필요’로써 입을 뿐 ‘의미’로써 입는 일이 없어, 어느 경우든 옷보다 사람을 먼저 보여줍니다.
오랜 세월을 징역 살아온 1급수들은 과연 징역의 달인들답게 엄청난 주벽(周壁)과 철창에도 주눅들지 않고 흡사 내 집 마련해서 가꾸는 흥겨움으로 걸죽한 농담 우스개를 잘도 화답해가며 일손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몇 해나 더 이곳에 자신을 가두어야 하나 착잡한 생각에 눌리었는지, 농담 우스개도 뚝 끊기고 돌자갈에 삽날 우는 소리만 적막을 더해주는 그런 섬뜩한 순간이 문득문득 찾아옵니다.
불더위와 물소나기가 그리도 팽팽히 싸워쌓더니, 끝내 더위가 한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긴 것은 물이 아니라 세월이었다 행 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아가 벼슬자리에 오르면 왕권주의자가 되고 물러나 강호(江湖)에 처하면 자연주의자가 되기 일쑤인 모든 봉건 지성의 시녀성과 기회주의를 둘 다 시원히 벗어던지고, 갖가지의 수탈장치 밑에서 허덕이는 농민의 현실 속에 내려선 다산의 생애와 사상은 분명, 새 세기의 새로운 양식의 지성에 대한 값진 전범(典範)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먼저 무엇을 겪는다는 것이며, 겪는다는 것은 어차피 ‘온몸’으로 떠맡는 것이고 보면 적성(積成)이 없다 하여 절절한 체험 그 자체를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약은 그 어감에서 느껴지는 화려함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 ‘곱셈의 논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그 즐거움은 놀이이며, 궁리는 학습이고, 만들어내는 행위는 곧 노동이 됩니다. 이러한 생활 속의 즐거움이나 일거리와는 하등의 인연도 없이 칠판에 백묵으로 적어놓은 것이나 종이에 인쇄된 것을 ‘진리’라고 믿으라는 ‘요구’는 심하게 표현한다면 어른들의 폭력이라 해야 합니다. 이런 무리한 요구에 억눌려 자라지 못하는 무수한 가능성의 싹들을 생각하면 시험과 성적과 모범 등……. 이러한 학교의 도덕적 규준이 만들어내는 품성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소년을 보살피는 일은 천체망원경의 렌즈를 닦는 일처럼 별과 우주와 미래를 바라보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사명당실기』의 서두에서 인용하신 “사람은 그 부모보다 그 시대를 닮는다”는 아버님의 글이 이상의 모든 서술의 압축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징역 초년,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는 생각의 녹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생각을 녹슬지 않게 간수하기 위해서는 앉아서 녹을 닦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컨대 일어서서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랑 많이 일굴수록 쟁깃날은 빛나고”, 유수봉하해, 흐르는 물은 바다를 만난다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재확인이었습니다만 이것이 제게 갖는 뜻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짐이 많은 사람은 남의 일손을 도울 겨를이 없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도리어 적게 가진 사람의 도움을 받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빈손이 일손입니다. 적게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데 작은 것 하나 버리는 데도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기 3개, 칫솔, 수건, 젓가락 각 1개씩만으로 징역을 살아가는 용기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비록 무기징역을 핑계삼는다 하더라도 아직 더 버려야 합니다. 용기는 선택이며 선택은 골라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을 버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남에게 자기를 설명하려고 하는 충동은 한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를 반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어차피 나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귀착되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으며
계수님께 (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며
아리안의 영광과 아우슈비츠를 생각한다.
잔디만 남기고 잔디 외의 풀은 사그리 뽑으며
남아연방을 생각한다. 육군사관학교를 생각한다.
그리고 운디드니의 인디언을 생각한다.
순화교육시간에 안내훈련 대신 잡초를 뽑는다.
잡초가 무슨 나쁜 역할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잔디만 남기고 잡초를 뽑는다.
도시에서 자라 아는 풀이름 몇 개 안되는 나는
이름도 모르는 풀을 뽑는다.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잡초가 된 풀을 뽑는다.
아무도 심어준 사람 없는 잡초를 뽑으며,
벌써 씨앗까지 예비한 9월의 풀을 뽑으며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잘 알고 있던 것 같은 것들이 갑자기 뜻을 잃는다.
구령에 따른 동작처럼 생각 없이 풀을 뽑는다.
썩어서 잔디의 거름이 될 풀을 뽑는다.
뽑은 잡초를 손에 쥐고
남아서 훈련받는 순화교육생을 바라본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원산폭격, 한강철교의 순화교육생을 바라본다.
뽑혀서 더미를 이룬 자초 위에 뽑은 잡초를 보태며
15척 주벽(周壁)을 바라본다. 주벽 바깥의 청산(靑山)을 바라본다.
보내주신 책 두 권은 열독이 허가되지 않아 읽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보내주신 마음은 잘 읽고 있습니다.
‘1등’이 치러야 하는 긴장감, ‘모범’이 요구하는 타율성에 비해 ‘중간은 풍요하고’ ‘꼴찌는 편안하며’ ‘쪼다는 즐겁다’는 역설도 그것을 단순한 자기합리화나 패배주의의 변(變)이라 단정해버릴 수 없는 상당한 양의 진실을 그 속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밤새워 일하는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은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도 밝혀줍니다.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 없음’입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햇빛 한 줌 챙겨줄 단 한 개의 잎새도 없이 동토(凍土)에 발목 박고 풍설(風雪)에 팔 벌리고 서서도 나무는 팔뚝을, 가슴을, 그리고 내년의 봄을 키우고 있습니다.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에 비해 겨울을 지혜롭게 보내고 있습니다.
도울 능력은 있되 만남이 없는 관계와 만남이 있되 도울 힘이 없는 관계에 대하여 그날 밤 늦도록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의 의미에 관하여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만 그때의 아픈 기억만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C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추위는 흡사 ‘가난’처럼 불편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불편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써오던 칫솔에 비하여 빳빳한 새 칫솔은 잇몸을 아프게도 하지만 이빨을 훨씬 깨끗이 해줍니다.
생각해보면 비단 이빨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우리들의 심신의 일부분을 여기, 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묻는 과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입방 길에 잠시 운동장에 서면 누구나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성공은 그릇이 넘는 것이고, 실패는 그릇을 쏟는 것이라면, 성공이 넘는 물을 즐기는 도취인 데 반하여 실패는 빈 그릇 그 자체에 대한 냉정한 성찰입니다. 저는 비록 그릇을 깨뜨린 축에 듭니다만, 성공에 의해서는 대개 그 지위가 커지고, 실패에 의해서는 자주 그 사람이 커진다는 역설을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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