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외계(外界)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뭇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 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의 염전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의 쇄골이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펴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들을 본다
드라이아이스
-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들어가고 있다
귀신처럼.
* 고대 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몸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부재중(不在中)
말하자면 귀뚜라미 눈썹만한 비들이 내린다 오래 비워둔 방 안에서 저 혼자 울리는 전화 수신음 같은 것이 지금 내 영혼이다 예컨대 그 소리가 여우비, 는개비 내리는 몇 십 년 전 어느 식민지의 추적추적한 처형장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두고 바닥에 내려놓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댕강댕강 목 잘리는 소리인지 죽기 전 하늘을 노려보는 그 흰 눈깔들에 빗물이 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카자흐스탄에 간 친구가 설원에서 자전거를 배우다가 무릎이 깨져 울면서 내게 1541을 연방연방 보내는 소리인지 아무튼 나 없는 빈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충혈된 빗방울이 창문에 눈알처럼 매달려 빈방을 바라본다 창문은 이승에 잠시 놓인 시간이지만 이승에 영원히 없는 공간이다 말하자면 내 안의 인류(人類)들은 그곳을 지나다녔다 헌혈 버스 안에서 비에 젖은 예수가 마른 팔목을 걷고 있다 누워서 수혈을 하며 운다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았나니 너희는 평생 내 안에 갇혀 있을 것이다 간호사들이 긴 꼬리를 감추며 말한다 울지 마세요 당신은 너무 마르셨군요 요즘은 사람들의 핏줄이 잘 보이지 않아요 우산을 길에 버리고 고개를 숙인 채 예수는 빗속을 떨면서 걸어간다 죽은 자들이 다가와 우산을 씌워준다 곧 홍수가 나겠어요 성(成)으로 돌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군요 나는 나의 성(星)을 잃어버렸네 성(性)을 중얼거리는 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을 기억해내려는 그들은 비 맞으며 자신의 집으로 저벅저벅 문상 간다 생전에 신던 신발을 들고 운다 발광(發光)한다 산에 핀 산꽃이 알토끼의 혀 속에서 녹는다 돌 위에 하늘의 경야(經夜)가 떨어진다 예수가 내 방의 창문 앞에 와서 젖은 손톱을 들어 유리를 긁는다 성혈이 얼굴에 흘러내린다 나는 돌아온다 말하자면 이 문장들은 生을 버리고 성(聲)의 세계로 간 맹인이 드나드는 점자들이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내 우주에 오면 위험하다
나는 네게 내 빵을 들켰다
기껏해야 생은 자기 피를 어슬렁거리다 가는 것이다
한겨울 얼어붙은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늘어지며
눈동자에 살이 천천히 오르고 있는 늑대
엄마 왜 우리는 자꾸 이 생에서 희박해져가요
내가 태어날 때 나는 너를 핥아주었단다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싶은걸요
네 음모로 네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삶이란다
눈이 쏟아지면 앞발을 들어
인간의 방문을 수없이 두드리다가
아버지와 나는 같은 곳에 똥을 누게 되었단다
너와 누이들을 이곳에 물어다 나르는데
우리는 30년 동안 침을 흘렸다 그사이
아버지는 인간 곁에 가기 위해 발이 두 개나 잘려나갔단다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서성거리는걸요
길 위에 피를 흘리고 다니지 마라
사람들은 네 피를 보고 발소리를 더 죽일 거다
알아요 이제 저는 불빛을 보고도 달려들지 않는걸요
자기 이빨 부딪치는 소리에 잠이 깨는 짐승은
너뿐이 아니란다
얘야, 네가 다 자라면 나는 네 곁에서 길을 잃고 싶구나
없는 내 아이가
가위로 햇빛을 자르고 있다
없는 내 아이가 방 안에 들어오는 햇빛을 자르고 있다
잘린 햇빛에 가서 지렁이들이 하혈을 한다
사람들의 농성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발파 전문가들이 옥상에서 모닥불을 피웠다
여인이 배를 움켜잡고 중력을 토한다
갈라진 천장에서 죽은 쥐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컵에 있던 눈에 음모가 나기 시작했다
살고 싶은데 고양이가 죽은 쥐를 핥기 시작한다
아프지 않은데 물약을 먹고 이빨들이 녹기 시작했다
여인은 장롱 밑으로 기어들어가 인광(燐光)을 뿜는다
죽지 마 가위로 햇빛을 잘라줄게
없는 내 아이가 가위로 자신을 조금씩 자른다
토막 난 채 바싹 말라 있는 지렁이
환대(環帶)가 환하다
아버지의 귀두
아무도 없는 놀이공원의 아침, 아버지가 혼자 공중에서 빙빙 도는
놀이기구를 타면서 손을 흔든다
아들아 인생이 왜 이러니……*
어느 날 아버지의 귀두가 내 것보다 작아졌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와 장난감 트럭을 들고 목욕탕에 가지 않고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악어 벨트를 허리에 차고 밖에 나갈 수 없고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속주머니를 뒤져
오락실에 갈 수도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30년 넘게 혼자 목욕탕에 가시고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복권의 숫자를 고민하며 혼자 씩 웃는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나와 같은 THIS를 산다
돗자리에 누워서 잠드신 아버지의 팬티 사이로 누름한 불알 두 쪽이 바닥에 흘러나온 것을 본다 자궁이 넓은 나무와 자고 돌아와 나는 누런 잎을 피웠다 잠은 내 옆으로 와 아버지가 귀뚜라미처럼 조용히 누웠다 나는 문득 자다가 일어나 삐져나온 아버지의 귀두가 저렇게 작았나 하는 생각에 움찔했다 귀두라는 것이 노려볼수록 자꾸 작아지는 것인가 귀두란 그런 게 아니지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민항기의 대가리처럼 푸르르 가열될 텐데 아버지와 나는 귀두가 닮은 나무, 한쪽으로만 일어서고 한쪽으로만 쓰러져서 잠드는, 축 늘어진 아버지의 THIS를 잡고 웃는다 씨벌 아비야 우리는 슬픈 귀두인 게지 죽은 귀두를 건드리면 뭐 하니? 그런 생각 끝에 나는 튼튼 우유를 하나 사 가지고 와 잠드신 아버지 옆에 살짝 놓아드렸다
양쪽으로 여십시오/ or 반대편으로 여십시오/
* 인디밴드 아마추어증폭기 노래 가사 중.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왕을 모셨지 - 보후밀 흐라발 (0) | 2009.05.28 |
---|---|
착각하는 뇌 - 이케가야 유지 (0) | 2009.05.27 |
나와 카민스키 - 다니엘 켈만 (0) | 2009.05.20 |
지식e 4 - EBS지식채널 (0) | 2009.05.15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0) | 2009.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