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키르케고르, 존 D. 카푸토, 웅진지식하우스, 2008(초판 1쇄)
키르케고르의 경우, 초점은 ‘영원의 상 아래에서(sub specie aetemi)’, 영원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서 시간 안에서의 자신의 삶을 영원의 빛에 드러내는 것에 집중된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영원한 반향이 있을 것이고, 영원 안에서 내 운명을 결정할 것이며, 또 나는 덧없는 유행이 아니라 영원의 명법에 기초해서 내 삶을 영위해야 한다.
키르케고르가 코펜하겐의 헤겔학파와 갈등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키르케고르는 그들이 모두 철학이라는 게임의 득점 기록자들일 뿐, 아무도 선수로 뛰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거니와, 이는 그들이 헤겔에 관한 비평만 쓸 뿐 정작 아무도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라는 뜻이다.
부부간의 사랑은 소유로 시작해서 내적 역사를 획득한다.
부부간의 사랑은 시간 안에 자신의 적을 두고 있으며, 시간 안에 자신의 업적이 있고, 시간 안에 자신의 영원성을 소유하고 있다.
개인은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게 아니라 자신과 싸우며, 그 내부에서 사랑과 끝까지 싸운다. 또 그들은 시간과 관련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진리는 현재의 그들로, 최종적으로 존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처음에 서 있고 또 미래는 앞에 있으며, 매일매일은 다시 “나는 한다”라고 말하라는 새로운 요구를 제시하는데, 그럼으로써 “나는 한다”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오직 최후에서뿐이다. 오직 최후에만 그 서약은 최종적으로 지켜진다.
자기를 실체 내지 정신으로, 또는 본질로 간주하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을 택하는 대신, 키르케고르는 자기를 자유라는 천으로, 선택이라는 직물로 직조된 일종의 원천으로서 도입하고 있다.
키르케고르에게 이 이야기의 교훈은 윤리적 규범은 예외를 허용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하느님, 즉 도덕법칙을 만드신 분이 만일 그렇게 선택하기만 한다면 그 어떤 규범이라도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심히 위험한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종교적 폭력에 휩쓸리고 있는 이때, 또 하느님의 이름 아래 살인할 권위가 있다고, 심지어 그런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위협당하는 이때보다 더 위험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것이 진리라고 마음속 깊이, 정열적으로 확신하고 있기만 하면 그것은 진리인가?
신앙의 진짜 가격은 종교적 공포(horror religiosus), 아브라함의 무서운 과업의 공포와 전율이며, 이는 헤겔학파 철학자들, 즉 오로지 합리적인 것, 인간적인 것, 내재적인 것만을 다루는 유한성의 중개자들을 좌절시킨다.
그리스도교는 실천해야 할 그 무엇이지 철학적 난제가 아니다.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누군가가 신조의 명제를 긍정할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행할 때이다.
만일 내가 하느님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장점은 진실한 그리스도교도의 삶은 무한히 어렵다는 것, 매우 드물고 또 비용이 많이 드는 품목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었으며, 반면에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리스도교 국가에서는 만인이 그리스도교도이며 또 그리스도교는 싼값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첫째로 이러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우쳐야 했다.
대중은 전체이자 무이며, 모든 힘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고 또 가장 무의미한 것이다.
추상물인 ‘언론’은 (…) 추상의 유령 ‘대중’을 낳는데…
왜냐하면 결국 그것은 대중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개였기 때문이다.
대중은 폭정을 자행하는데, 키르케고르는 이를 개를 시켜 끊임없이 노예를 공격하게 하며 즐기는 퇴폐적인 로마 황제에 비유하였다.
부자이건 가난하건, 남자이건 여자이건 그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살면서 입는 많은 의상일 뿐이다. 만일 연극의 마지막에, 배우들이 의상을 벗을 때, 한 배우가 자신의 역할에 집착해서, 계속해서 자신이 나폴레옹이나 혹은 일본의 천황이라고 믿고서, 주위에 있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명령하고 또 그들이 복종할 것을 기대한다면 그 결과 어떤 바보짓이 일어날지 상상해보라.
키르케고르에게 차별적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사랑의 형태인데, 왜냐하면 나의 배우자나 자녀나 친구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훨씬 광범위한 나 자신의 범위, 나의 또 다른 확장된 자기와의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명령받은 사랑은, 심오하게 인류 평등주의적이고 또 비 – 차별적이며, ‘이웃’을 향해 있다.
자기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다.
이 삶에서의 우리의 운명은 염세(厭世)의 최고 정점까지 고양되어야 한다.
키르케고르는 세상이 싫어지는 것이 ‘영원에 합당할 정도로 성숙한 존재로’ 만든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최선의 길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만일 그대가 태어난다면, 삶을 영속시키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키르케고르는 만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착각이 너무나 큰 탓에 아무리 누군가가 평생 동안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격렬하게 항의한다 해도 그는 그래도 그리스도인으로 묻힐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other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사랑일까 - 알랭 드 보통 (0) | 2009.06.18 |
---|---|
내셔널지오 그래픽 코리아 - 2009년 6월 (0) | 2009.06.17 |
바다의 기별 - 김훈 (0) | 2009.06.01 |
시인 - 마이클 코넬리 (0) | 2009.06.01 |
영국왕을 모셨지 - 보후밀 흐라발 (0) | 2009.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