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바다가 그 물줄기를 당겨서 데려가고 밀어서 채우는데, 물 빠진 갯벌은 ‘떠돌이 창녀 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 (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이름과 부름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시간 속에서는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하다. 모든 강고한 것들은 무너지지만, 저녁노을이나 아침이슬은 사라지지 않는다
창세기 이래로, 인간은 죽음으로써 지구를 구해냈을 것이다. 다들 죽어 없어지지 않았다면, 또 다들 살 자리가 없어서 죽었을 터이다. 그래서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세계와 후손을 위해서 베푸는 가장 큰 보시이며 은혜일 것이다.
글을 쓸 때 내 마음속에는 국악의 장단이 일어선다. 일어선 장단이 흘러가면서 나는 한 글자씩 원고지 칸을 메울 수 있다. 이 리듬감이 없이는 나는 글을 쓸 신명이 나지 않는다.
나는 시를 쓰지 못하고, 시를 쓸 수 있게 되는 마음의 바탕을 이해하지 못한다.
언어를 분석하면 또 다른 언어의 부스러기들은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 부스러기들을 다시 분석하면 또 다른 부스러기들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나는 때때로, 언어의 동어반복의 운명 앞에서 절망하고 전율한다.
시집을 읽을 때 내 마음은 페이지 위로 떠올라서, 페이지와 램프 사이를 떠돌다가, 램프 너머로 흘러간다. 마음이 떠난 페이지 위에 언어는 여전히 시행으로 남아 있다. 나는 다시 페이지 위의 언어를 들여다본다. 이 꼬불꼬불한 글자들은 대체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는 인기척, 그것이 인간의 희망인 것이다.
나는 고향도 없고 타향도 없는 세상이 좋다.
어머니는 “… 반듯하고 조용히 말해라, 조용히 말해야 남이 듣는다”고 타이르셨다.
사람들이 명절이면 기어이 돌아가는 그 고향이 아직도 그들의 고향일 것인가. 당신들의 고향은 아늑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인가. 정말로 그러한가. 불타버린 남대문의 잿더미를 바라보면서 나는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영원한 허상을 향해 기를 쓰고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화가가 자신의 내면을 직접 드러낸 글은, 글과 그림 사이의 그 먼 간격으로 차단되는 것이어서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풍경에 부딪친 화가의 시선이 그의 마음속에서 풍경과 표현 사이의 불화와 싸움의 과정을 거쳐서 화폭 위에 출현하게 되는 비밀의 일단을 보여준다.
삶은 가지런할 수가 없는 것이고 오치균의 화폭 또한 그러하다.
보는 자는 입이 또한 있어서 자꾸 묻는데 오치균은 묻지 않고 다만 그린다.
나는 요즘 신문이나 저널을 읽기가 너무 어려워요. 왜냐하면 그 언어가, 이 사회적 담론이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됐기 때문에,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죠. 이 사회의 지배적 언론과 담론들이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해버리는 거에요. 그걸 뒤죽박죽으로 말을 하니까 이런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기여할 수가 없는 것이고 이런 언어가 횡행할수록 인간 사이에는 소통이 아니라 단절이 심화되는 것이고 이 단절이 지금 거의 다 완성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이것이 우리 언어의 현실에 대한 나의 인식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고 의견을 사실처럼 말해버리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해버리는가. 왜 그런가. 아마도 그들이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라고, 신념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의견과 사실은 뒤죽박죽이 됩니다. 나는 신념에 가득 찬 자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히려 의심에 가득 찬 자들을 신뢰합니다.
제가 쓴 몇 편의 소설 속에는 아무런 위안이 없습니다. 다만 독자들을 한없는 고문과 고통과 절망의 늪으로 몰고 나가는 것, 그 결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 세계의 의미와 무의미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이 저의 글쓰기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언어적 비극은 듣기(hearing)가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채팅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듣기가 안 되니까, 청각장애인들이 다 모여 있는 거죠. 인간의 언어네는 네 가지가 있는데, 말하기•듣기•읽기•쓰기입니다.
나는 조사를 안 좋아해요. 한국말의 조사는 나한테는 너무 어렵고 다루기가 힘들어요. 조사는 한 음절(one syllable)인데, 그게 몇 개 안 돼요. 대 여섯 개밖에 안 되는 이 한 움큼을 이리저리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가난한 살림을 사는 것입니다. 서양말은 조사가 없잖아요. 서양말에서 ‘I love you’라고 하면 동사가 목적어를 바로 지배해버리기 때문에, 동사와 목적어에 사이에 조사가 거치적거리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할 때 ‘는’과 ‘를’을 안 읽으면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어로 글을 읽는다는 것, 한국어로 사유를 한다는 것은 조사를 읽고, 조사를 경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모국어를 폄하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모국어가 지금 당면한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듯이, 우리말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과학적이고 훌륭한 말이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학교가 가르치는 거짓말이에요. 학교는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가르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어요. 이것은 나쁜 일은 아니에요. 학교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가르치지만 직업에는 정말 귀천이 없을까? 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면 대학을 왜 다녀. 그러나 학교는 또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글이 써지지 않는 새벽에 나는 때때로 장대높이뛰기 선수를 생각했다. 그는 솟구치기 위하여, 오직 지상의 단 한 점 위에 장대를 박는다. 그는 그 점 위에 선다. 그는 솟구치기 위하여 장대를 버린다. 지상의 그 한 점과 장대마저 버린 후 그는 아름답고 외롭게 숫구쳐 오른다.
내 천박한 독서량 전체를 걸고 말하거니와, 책 속에는 길이 없다. 글 속에는 길이 없다. 글 속에는 길이 없고, 글이 있을 뿐이다. 말 속에는 길이 없다. 길은 세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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