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버린 하루

 

 

노트를 채우기 위해 아무거나 적어 놓고

북북 지워버리는 날이 있다

그렇게 살아보는 날이 있다

두 손을 지우개처럼 모아 얼굴을 씻다가

대충 살아 쌓인 것들을 닦아내다가

그냥 북 찢어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날 하루를 파지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날

뭉툭해진 얼굴로 하루를 문대 지우고 싶은 날

누구였더라 기다리는 사람은

늦는 법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리다 죽었을 사람은.

어쩌면 아주 오래 전 내가 했던 말

하루가 온전히 종이 위에 올라서기를

무릎 꿇고 기다리던 때

그러니까 자정이 되어 하루를 스무 조각으로 찢어버린 날

물 받은 욕조에 맨발을 슬며시 담그듯

노트에 맨 몸 담그는 하루를 훔쳐보기 위해

페이지 열어놓고

나는 발기되는 걸 느꼈다

수그러드는 걸 느꼈다

흘르는 걸 느꼈다

하루가 볼 때도 종이는 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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