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포스티노와 빈대떡, 김은자시론집, 고려대학교출판부, 2009(초판 1쇄)
‘시인’이란 대저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보르헤스가 말하듯이, 시란 한 잔의 차를 ‘마시듯’ 맛보고 즐기는 것이다.
선생님, 어떡하면 좋지요?
전 사랑에 빠졌어요……
거기엔 치료약이 있다네
약은 필요 없어요
계속 아프고 싶어요……
- <일 포스티노> 중
어머니가 매던 김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사상(思想)을 모른다
어머니가 사상가(思想家)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평생인 것을 모른다
초가집이 섰던 자리에는
내 유년(幼年)에 날아오던
돌멩이만 남고
황막(荒漠)하구나
울음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내가 자란 마을에 피어난
너 여리운 풀은
-
필경사(筆耕士)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 글씨를 쓰듯이 별빛들을 쓰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하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묵란(墨蘭)잎새처럼 쳐 있는 것도 또는 그 아린 냄새처럼 닥나무 닥지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어린 갈매빛 갈매빛의 계곡 물소리로 반짝 반짝 흐르는 것도 아니고 도장(圖章)처럼 붉게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별빛들은 반물모시 옷고름처럼 풀리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여리여리 눈부셔 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수평선 위에 뜬 흰 섬들을 바라보듯이 쳐다봐지지도 않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치자(梔子)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삐뚤빼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쓸 수밖에 없음을 지금 알겠다.
내가 늦은 소주에 푸르게 취해 그녀를 아프게 아프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저 녹청(綠靑)기왓장 위 별빛들을 쓰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지금 알겠다
-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 기형도, <병(病)> 전문
눈 내리는 밤, 야근을 하고 들어온
중년의 시인이 불도 안 땐 구석방에
웅크리고 앉아 시를 쓰는 밤,
CT를 찍어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편두통에 시달리며
그래도 첫 마음은 잊지 말자고
또박또박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쓰는 밤,
어둡고 흐린 그림자들 추억처럼
지나가는 창문을 때리며
퍼붓는 주먹눈, 눈발 속에
소주병을 든
불쑥, 언 손을 내민다
어 추워, 오늘 같은 밤에 무슨
빌어먹을 짓이야, 술 한 잔하고
뒷산 지붕도 없는 까치집에
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줘, 그게 시야!
-
‘봄날’이 인생의 다른 이름이라는 느낌이 비로소 온다.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 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
즌 데만 디뎌온 것은 아니었으리라. 더러는 마른 땅을 밟아보기도 했으리라. 시린 눈발에 얼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더러는 보드라운 버선코를 오똑 세워 보기도 했으리라. 종종걸음만 친 것은 아니었으리라. 더러는 덩실 어깨춤을 실어 보기도 했으리라.
열무김치에 물 말아 자신 밥상 너머 물 날은 몸빼 밑으로, 아니 혼곤한 낮잠 사이로 비어져 나온, 뒷꿈치가 풀뿌리처럼 갈라진.
- 반칠환, <어머니 1> 전문
시는 의미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다. 시는 존재의 차원에 있다. Ars Poetica(매클리시)에서 시적으로 형상화된 존재론적 시론은 이제 고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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