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폴 오스터, 열린책들, 2009(보급판 8쇄)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심지어는 다크가 설명한 대로 그 <말 속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몇 시간씩 밤하늘을 쳐다보며 점점이 박힌 별 무리들을 곰, 황소, 궁수, 물병 등과 일치시켜 보려고 애를 쓰곤 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들어맞지가 않았다.
「흠. 아주 재미있군. 나는 이 퀸이라는 말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고 있소. quintessence(정수)…… quiddity(본질). 또 거기에다 quick(핵심), quill(진짜), quack(가짜), 그리고 quirk(괴짜). 흠. grin(웃음)하고도 운이 맞는군. kin(동족)은 말할 것도 없고. 흠, 아주 재미있군. 그리고 win, fin, din, gin, pin, tin, bin하고도. 심지어 Djinn하고도 운이 맞아. 흠. 또 been하고도 맞겠는걸. 흠. 그래, 아주 재미있어. 댁의 이름이 정말 마음에 드오, 미스터 퀸. 동시에 아주 여러 방향으로 퍼져 나가는 이름이니 말이오.」
「사람들은 대개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소. 그들은 말을 돌멩이, 생명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커다란 물체, 절대로 변하지 않는 단자(單子)라고 생각하거든.」
「세상이 선생님의 양 어깨에 걸려 있군요.」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세상, 또는 그 세상의 남은 부분이 말이오.」
「그렇소. 마침내는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을 말하게 해줄 언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은 이 세상과 부합하지 못하고 있소. 사물들이 온전했을 때 사람들은 인간의 언어가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고 자신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그 사물들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부서져서 혼돈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만 거요. 그런데도 우리의 언어는 예전 그대로요. 말하자면, 언어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는 뭔가 본 것을 말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가 표현하려고 하는 바로 그 사물을 왜곡시켜 잘못 말하게 되는 거고.」
「그것은 모든 인간이, 말하자면 달걀에 불과하기 때문이오. 우리는 존재하지만, 우리가 운명적으로 이르게 되어 있는 형태에 이르지는 못했소. 우리는 순전히 잠재적인 존재,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의 표본이오.」
통화 중임을 알리는 신호음이 그의 발걸음에 대한 대위(對位) 선율, 제멋대로인 도시의 소음 한가운데서 꾸준히 박자를 맞춰 주는 메트로놈이 되어 있었다.
이미 일어난, 일어나게 되어 있던 일이라는 의미에서의 운명, 그것은 It is raining이라든가 It is night이라는 구절에서 비인칭 대명사인 It과 같은 것이었다. 퀸은 그 It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어쩌면 현재 처해있는 상황의 일반적인 조건,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난 바탕이 되는(있음)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잠시 일어나서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 이어 낮이건 밤이건 상관없다고 마음을 정했다. 지금이 밤이 아니라면 나중에 밤이 될 테니까.
단어들이 그와 세상 사이에 있는 커다란 창문처럼 투명하고 지금까지는 그의 시야를 흐린 적도, 아니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 적도 없다. 아, 물론 유리창에 작은 얼룩이 져서 한두 군데를 닦아 내야 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단어를 찾기만 하면 모든 것이 말끔해진다.
워싱턴 뢰블링 자신은 그 다리에 발을 올려 놓은 적도 없었지만 아주 작은 철재와 석재에 이르기까지 다리를 구상하는 모든 부분들을 하나하나 다 암기하여 수년에 걸친 공기가 끝날 무렵에는 어떤 식으로든 그의 몸속에도 다리가 놓인 것처럼 온갖 세부 사항들이 그의 머릿속에 온전히 다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관련이 있어요. 뇌와 창자, 즉 인간의 내면 사이에는요.
글을 쓰는 건 혼자 하는 일이니까요. 그게 삶을 다 차지하죠. 어떻게 본다면 작가에게는 자기의 삶이 없다고도 할 수 있어요. 설령 있다고 해도 실제로는 없는 거죠.
이게 당신이 친구 대접을 하는 식이라면, 블루가 되받는다. 내가 당신의 적이 아닌 게 천만 다행이군.
그는 아주 일찍부터 자아를 형성했고, 우리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쯤에는 이미 명확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들 대부분이 형체도 갖추지 못한 채 한순간 한순간 무턱대고 허둥대며 끊임없는 소란에 휩쓸렸던 반면, 팬쇼는 분명히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아이였다. 하지만 이 말은 그가 빨리 성장했다는 뜻이 아니라 – 그는 결코 자기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 적이 없었다 – 어른이 되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그가 자기 아들을 어떤 사람으로 키울 것인지 염두에나 두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자신이 아이였을 때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전에 누군가가 말했듯이, 이야기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생겨나는 법이다. 경험 역시 아마도 그와 마찬가지로,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생기는 모양이다.
낱말들에 신경을 쓰면서 쓰인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책의 힘을 믿는 일, 그것이 나머지를 압도해서 그 옆에서는 사람의 삶이 아주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권태로 인해 식욕이 엄청나게 붙은 선원들은 말 그대로 끼니와 끼니 사이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제 팬쇼의 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예리해져서 마치 보는 일과 글 쓰는 일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두 행위가 거의 같아져 단일하게 이어진 하나의 몸짓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파리에서는 사물들이 이상하게 더 커 보였다.
「여기서부터 2백 마일쯤 떨어져 있지.」 내가 대답했다.
「그럼 우주만큼 멀어?」
「똑바로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면 그쯤 가까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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