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비가 내린다.
몸살이 났는데
아무래도 지난 금요일 있었던 피티 때문에
긴장했던 몸과 정신을 추스르기 전에
00쟁이 정모에 나가서 그런 것 같다.
에치.
마침 회사 클라이언트가 감기약을
싸게 판대서 한 박스 신청해 놨다.
쌀쌀하다.
에치.
문득 레게 뮤지션 밥 말리는
가을 비를 맞아봤을까 궁금하다.
감기에는 밥 말리가 좋다.
우리 형이 캐나다로 이민가면서
지어간 영어 이름이 밥이다.
성은 김.
농담이 아니다.
형은 외국인들 사이에서 이름이 불려도
한국 생각 나서 좋을 것 같다고
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이 그리운 모양이다.
늦은 시간 퇴근하고
12시경 캐나다에서 전화를 하면
항상 나는 회사에서
회의 중이거나
회의를 준비 중이다.
피곤할 텐데 그냥 자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는 안쓰럽다.
나도 이민을 가면
한국이 그리울까.
에치. 그리울 거다. 특히
이 가을이.
심지어 한국에서 지금처럼
가을을 살고 있어도
그립다.
스무 살 때나 스물 다섯 살
그때쯤의 가을이.
00쟁이에서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나이가 젤 많네
형님이네
그런 말과 깍듯한 몸짓으로
가을 날 아픈 맘과 몸을
후벼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도 웃으면서.
00쟁이에서는 00쟁이에 대한 PT를
돈도 안 주면서 시켰는데
아무래도 악질
에치.
감기 몸살이다.
내가 00쟁이를 찾는 이유는
그곳이 뭔가 계속 움직이고 있고
새로운 면과 변화가 있고
내가 별로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열정
이 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뭔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인데,
그 뭔가가 참 애매하다.
그 뭔가를 분명히 발견한 이들은
분주하게 계속해서 참가하는 것일 테고
그 뭔가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은
빙빙 겉돌다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관찰자 입장에서
사람들을 보다 보면 결국
뭔가를 발견하려고 자꾸 덤비고 능동적으로
다가가는 사람은 발견하게 되고
뭔가가 저절로 발견 되어 주기를
막연히 앉아 기다리는 사람은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가 안 좋은 몸으로
나가서
에치.
몸살을 발견해 온 것도
발견이다.
형편 없는 약골.
누구는 911 테러 붕괴 현장을 겪고도
멀쩡하던데.
만화 바쿠만을 일요일에 봤다.
프로 만화가를 꿈꾸는 14세
남자 녀석들의 사실적이면서 사실적이지 않은
이야기였다.
내가 그 만화를 보면서 제일 놀랐던 건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나 객관적으로 자신의 장단점을
분석한다는 것.
보통은 그렇게 안 되지 않나.
보통은 자기한테 좀 더 너그럽지 않나.
4시간만 자면서 만화를 그리던 놈이
웃으며 말했다.
“수면 시간만큼은 프론데 우리”
어쨌거나 프로 카피라이터인 나는
그렇게 자면 죽는다.
00쟁이 정모에 나온 많은 학생
또는 취업 준비생들은
‘오늘은 특강 없나?’하는
말들을 했다.
특강 한 번 들은 것이
지금까지 못 보던 어떤 길을 쫘악-
제시 하거나 비젼을 촤악-
열어주거나 완벽한 솔루션을 빠샥-
뿌러뜨려 주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특강을 듣고 있으면 왠지
특강을 듣고 있는 지금만큼은
한 발 짝 더 내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게
위안이 되는 거겠지.
나도 위안을 얻고 싶어 나갔는데
그들도 위안을 얻고 싶어 나왔으니
아픈 척도 못하고
힘든 척도 못하고
에치.
피티가 끝나자 마자 새로운 피티 시작이다.
라는 말을 쓰면
힘내세요, 잘 하실 거예요 등의
답글이 달릴 까봐 쓰지 않겠다.
썼어도 쓴 거 아니다.
이빨만
닦아도 배고프다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는 건 염치 없는 짓이다.
아, 다만 여자 친구가 없어 괴로운 가을이라는 건
위로 받을 만한 일이다.
근데 이런 걸로 위로 받으면 창피하다.
언제부터 여자 친구 없다는 게
능력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게
되었을까, 모르겠다.
뭐 사실 능력 없다면 없는 게 맞지만
왠지 이런 쪽으로 능력 없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
때로는 추운 비도 위로가 된다.
한국의 가을비 같은 건
다른 나라에는 없겠지.
더 잘 살아보겠다고 이민 간 분들이라도
그리움까지 이민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도 이런 가을비를
보내주고 싶다.
해외전화 광고 아이디어로
해외에 있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에 내리는 가을비 소리를 들려주는 건 어떨까.
유학 간 자식에게 엄마가 요리한
된장찌개 끓는 소리를 들려주는 건 어떨까.
에치.
우리 엄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 끓는 소리가
기억나지 않는다.
광고 회사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이나
취업 준비생들은 이 커뮤니티에 와서
용기나, 가능성이나, 위로나, 격려 같은 걸
은연 중 받아가고 있을 것이다.
에치.
난 다른 걸 받아가고 있지만.
에치.
난 없는 말 못하고,
심지어 있는 말도 못한다.
이쁜 여자한테 이쁘다고 말 못한다.
나쁜 놈한테 나쁜 놈이라고 말 못한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 거다.
답답해서.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나는
백수나, 광부나, 학생들한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다만
이런 건 어떨까 싶다.
내가 비록 우아-! 오오-! 야아-!
이런 데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앞서 있다면 앞서 있으니까
지켜보는 건 할 수 있을 거다.
누가 격렬하고
누가 비열하고
누가 포기하고
누가 자책하고
누가 기어올라오고
누가 위협하고
누가 마침내 나와 경쟁하게 되고
그런 걸 지켜보는 거다.
그런 걸 기다리는 거다.
에치.
뻥이다.
가을이 지나가면 내 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걸.
맘이 바뀌면
지워버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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