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착하게 살기만 하면 자연히 행복해질 줄 알았다.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 결국에는 아름다운 애인이 생기고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 결국에는 재물과 복이 쏟아지고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 결국에는 행복이 찾아오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감동받고는 했다.

 

얼라들 보라고 나온 책들은 하나같이 그런 내용이었고

 

하나같이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는

 

감동이 흔했다.

 

마찬가지로 선생님들은 다 옳고 바른 줄 알았고,

 

여선생님들은 화장실에 가지 않는 줄 알았고,

 

생일 선물을 받지 못하거나 불행한 일이 생길 때면

 

그게 다 내가 착하지 않기 때문인 줄 알았을 정도로

 

착했다.

 

착한 사람 천국, 나쁜 사람 지옥.

 

세상이 명확해 보였다.

 

중고등학교 때는 무협지의 시대였다.

 

착한 놈들은 죽어 나가고

 

약혼자를 빼앗기고

 

배신 당하고

 

뼈와 가죽이 벗겨지고

 

무공이 폐지되고

 

독약에 중독되고

 

뒤에서 칼을 맞았다.

 

공교롭게도 대충 그때쯤

 

선생들이 하는 말과 행동이 맞지 않다는 것

 

그들의 논리가 엉터리라는 것도 눈에 띄었다.

 

이를 테면 수학에 관심 없는 학생이 굳이 수학을

 

공부해야 되는 이유에 대해 명쾌하게 답해주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착한 사람 되라는 말대신

 

좋은 대학 가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들려왔고,

 

좋은 대학의 기준은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들이 합격하는 곳이었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시험 점수가 좋은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공부는 곧 시험이었고

 

공부는 공부고 시험은 시험인데 어째서 이 둘이 같은 걸까

 

생각하는 동안 세상은 점점 불명확해져갔다.

 

착한 녀석보다 공부 잘하는 녀석이 더 대우받았고

 

다 너네 생각해서 공부하라 말하는 거라고 선생들은 말했는데

 

알고보니 학급 성적에 따라 선생들 고과가 매겨졌고

 

심지어 무협지의 세계가 더 명쾌했다.

 

어쨌거나 의리가 있고 의리를 위해 죽으면 후회가 없고

 

복수를 하면 훌륭한 인생이었다.

 

<게다가 사랑이라 말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데

 

어찌 사랑이라 말하겠나이까.

 

다만 이 안에 담아두고 저승에서 만나 뵈올 뿐입니다.>

 

라는 음란 서생의 감성이나.

 

<꿈에도 내게 발이 달렸다면

 

그대 집 앞 돌길의 절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입니다.>

 

라고 썼던 황진이의 감성은 

 

그래도 무협지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최후의 보루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얼라들 보라고 만든 책의 이야기가

 

거기에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순수하고 성실하면

 

맥 라이언 같은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TV광고에서는 영화같은 인생을 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한 10년 쯤 지나면

 

내가 속았구나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속고 있었구나라는 걸 

 

마지 못해 인정하게 된다.

 

실존주의랄까 냉소주의랄까 그런 걸 탐하게 된다.

 

특히 군대라는 곳을 스페셜하게 한 번 다녀오면

 

말만 많고 쓸쓸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대학에 가면 겨우 공부라는 걸 할 줄 있을 줄 알았다.

 

시험과 공부가 다르다는 걸 가르쳐주는 교양 수업이 있었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이어령 교수가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시험 문제를 풀어봤더니

 

반도 못 맞췄다더라.

 

이어령 교수가 바보거나 수능시험 문제 출제자들이 바보인 것인데

 

이어령 교수가 바보라면 다행이지만

 

수능시험 문제 출제자들이 바보라면 이것 참 큰일이다.

 

바보들이 낸 바보같은 문제들을 쏙쏙 풀어내는 바보들만

 

대학에 가는 것 아니냐.

 

그런 수업이었다.

 

잠시 행복했는데

 

온갖 폼은 다 잡던 4학년 전공 선배들이

 

하나같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거나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을 보고

 

현실, 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사회에 발을 디디고 나서부터는 아예

 

생각을 안 하기 시작했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지만 이미 내 생각 정도가 파고들어가

 

뭘 어떻게 해볼 여지를 주지 않았다.

 

현실은 그냥 현실이었고 사회는 그냥 사회였다.

 

승리는 페어플레이보다 중요하고

 

동등한 출발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잡지 한 권의 낱말들을 죄다 쏟아부으면

 

성공, 경쟁, 섹시, 스타일, 트랜드, 패션, 스타, 유행, 첨단, 전자, 속도, 연봉, 취업, 이직, 커리어, 기회, 유학, 해외파, 실력, CEO, 집값, 섹스, 이성, 아이돌, 코스메틱, 성형, 맛집, 계산, 투자, 재태크, 투잡, 물가 등등등이 우루루 쏟아지고

 

맨 마지막에 '착한 남자는 바보'라는 낱말이 하나 떨어진다.

 

그리고 공감한다.

 

뭐 그런 거지.

 

집에나 가자...

 

 

 

 

 

 

 

 

 

 

 

 

 

 

 

 

 

 

 

 

 

 

PS.

 

가끔 TV등에서 웃으랍시고 차카게 살자 문신한 조폭 캐릭터를 보는데

 

한순간 그 캐릭터가 도인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의 속빈 웃음이

 

착하다는 게 뭔지 나는 알고 있다 -_-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비행기를 한 번 탈 때 배출되는 CO2의 양이

 

자동차를 몇 년 동안 매일 운전하는 것보다도 많다는데

 

난 차도 없으니까

 

이 지독한 대기 오염에 별로 원인 제공하지 않았어

 

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도 해외여행 100번은 더 가려고 했는데...

 

환경을 생각해서 해외 여행을 삼가하는 인생과

 

그딴 거 무시할 정도로 난 소중해 라며 폼나게 해외여행 하는 것 중에서

 

나는 아마도 후자를 선택할 테지

 

차 카 게 살 자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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