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한번씩 10km 레이스를 하다 보면 신체 능력에서 도저히 내가 어쩔 수 없는 차이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내가 56분간 뛰어 10km를 달릴 때 같은 시간 20km를 달리는데 그 속도보다도 그 거리에 놀라게 된다.

 

 9.5km 지점부터 숨결마다 매딕이란 외침을 섞어 토해내는 내게 20km는 행군할 수 있는 거리지 달려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닌 것이다.

 

 애끓는 상황을 연출하고 싶다면 배트맨 다크나이트처럼 누군가의 연인을 납치해 시한폭탄을 설치해 놓고 그 누군가를 뛰게 하면 된다.

 

 만약 배트맨이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멋드러진 배트카가 아니라 운동화 꺼내 신고 달려갔더라면 그런 간지와 풍모가 날 수 있었을까.

 

 장거리 달리기는 배트맨조차 애절해 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매번 10km 후반부를 침과 콧물 흘리며 애절하게 온몸을 흔들어대며 철푸덕 출푸덕 뛰어오는 내 모습도 이해해줘야 한다.

 

 사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스스로 애절해지기 위해 뛴다.

 

 무미무미무미치도록 건조한 삶 속에 감정이란 겨우 인터넷에 올라온 스타들의 가십에서 오는 쪼가리 웃음이나, 비웃음, 그리고 짜증 짜증 심통 짜증 짜증 왕짜증 중간 짜증 간짜증 심통 짜증 답답 짜증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다.

 

 연인과 헤어져도 애끓지 않고 제법 쿨하게 견뎌낼 줄 아는 둔감한 청년이 되면서, 구조조정의 위협, 연봉삭감의 위협, 또는 뻑치기라도 당하지 않는 한 일상 속에 애절함을 경험하기 힘든 것이다.

 

 한번 애절하고 나면 아 난 애절한 놈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고 내 한계와 벽을 떠듬떠듬 만져 확인하게 된다.

 

 레이스는 누가 잘나고 누가 못났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 회사 생활에서처럼 딱히 근거 없이 다들 그래도 난 좀 더 잘난 줄로 아는 착각 속에 빠져드는 일이 없다.

 

 팀웍과 공동 작업을 강조하고 내가 잘했니 니가 잘했니 보다 우리가 잘한 것이라고 술 잔을 나누면서도 개개인의 고과가 매겨지고, 잘 된 결과엔 너도 나도 너그러워지는 문화를 빌미로 뭐 하나 한 것 없이 태클만 건 자라도 이거 내가 만든 거야 라고 말할 수 있는 회사와 비교할 때 레이스는 그만큼 애절하지만 명확하다.

 

 누군가 일에 있어서의 능력치를 마라톤 기록처럼 명확하게 치환할 수 있다면, 그런 계산을 해낼 수 있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과 같은 습성으로 일하게 될까?

 

 하루 대부분을 앉아있는 나는 10km를 뛰고 나면 온몸의 각 부위가 해체되는, 그러니까 뜯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예전 한창 노가다 뛸 때 아파트 유리를 몇 백장인가 날랐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었었었더랬다. 야 나 죽는다 하는.

 

 환골탈태야 무리겠지만 해체주의 정도는 야 이게 내 몸이구나구나구나 싶어서 견딜만하다.

 

 오늘 나보다 앞서 달린 놈들 다 기억해뒀다.

 

 나중에 카피 4천 미터 쓰기 대회 같은 데서 복수해주기로 했다.

 

 , 저 사람은 도저히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구나 라고 느끼게 해주기로 했다.

 

 올해는 처음으로 가로등 없는 산길을 밤에 뛰는 나이트레이스였다. 달릴수록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추한 모습이 달빛과 어우러져 가을 밤 묘한 정취가 있었다.

 

 다만 영화 속이야 어떻든 깊은 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일들은, 그런 애절함은 현실 속엔 없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달리기만 해도 그런 감정은 충분히 채워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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