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은 슬프다.
브랜드나 광고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컨셉이 있다 한다.
컨셉은 본질에서 나오며,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고 본질 개발에 적극적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만의 컨셉을 지니게 된다.
언제부턴가 컨셉이란 말이
‘억지’, ‘꾸밈’, ‘잘 보이기 위한 의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 오늘은 젠틀맨 컨셉이야. 나 오늘은 양동근 컨셉이야.”라는 말을 하며
누군가의 컨셉을 흉내 내는 것이 어색하고 낯선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일회성 컨셉은 진짜 컨셉이 될 수 없다 한다.
자기가 지닌 숙명, 본질에서 벗어난 컨셉은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컨셉이라는 게 참 슬퍼졌다.
장동건이라는 사람의 컨셉. 20년 째 아이돌인 이 사람의 컨셉을
원한다고 가질 수 없는 나는,
내 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내 매력을.
매우 근사하며 거대하고 천편일률적인 가훈이
집집마다 걸려있던 적이 있다.
이를 테면 그 가훈이 그 집의 컨셉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집들이 자기 가족의 특성과 본질을 외면한
껍데기 가훈을 걸어놓고는 했다.
정주영 회장 집에 떡하니 걸려있을 법한
그런 가훈을 원하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슬픈 일이다.
나의 컨셉을 생각하다 보면,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취향을 지니며 인간 관계가 어떻고
어떤 철학이나 가치관을 지니는가.
어떤 옷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로 이뤄진 세상을 꿈꾸는가.
하루 중 고통은 얼마고 행복은 얼마인가.
그러다 보면 나오는 컨셉들은 불행히도 상품성이 적은 것들,
다수보다는 소수가 좋아할만한 것들,
명도가 낮고 채도가 강한 것들,
미팅이나 소개팅 나가서 표를 얻기보다 외면 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다.
특정 소수에게 강력하나 다수에게 외면 받는.
그 컨셉을 뒷받침하듯
하루 종일 걸려온 전화 한 통, 날아온 문자 한 통 없다.
가끔은 상업성 전화를 받고도 기분 좋게 5분 10분씩 통화하기도 한다.
외로움이 답답하지만
불행히도 내 개성은 외로움에 강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즐길 줄 안다.
조금씩 뛰는 거리를 늘려가는 마라톤 선수처럼.
외로움을 쥐어짜면 뭐가 나올 지가 궁금하다.
책상 서랍에는 혼자서 본 영화표만 200장이 넘는다.
혼자 할 수 있는 수영을 즐기고,
학창 시절에는 같이 밥 먹을 사람 없다고 밥을 거르거나
혼자서는 학교 식당 못 가겠다고 빵 사다 먹는 애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누군가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만나는 게 아니라
심심함을 모면하기 위해 만나는 건 만남이 아니라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인류가 평화를 얻을 수 없는 건
자기 방에 혼자 가만히 있을 능력이 없어서라던 누군가(아마도 마크 트웨인…)의
말에 감동받기도 했었다.
이쯤 되면 내 인생이 내 컨셉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 왔으며,
그 컨셉에 의해 다음 인생도 끌려 들어가는 순환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내 삶이 내 컨셉을 만들고
그 컨셉이 내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컨셉을 바꾸어야 하는데
내 삶과 동떨어진 컨셉은 나의 컨셉이 아니므로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때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었는데, 비겁하게 행동해서
내 스스로에게 지워지지 않는 큰 상처를 남겼다…)
아무리 봐도 지금의 내 컨셉이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직장인이 얼마나 되겠나…)
무려 20년을 바래온 컨셉인데 아직도 내 것이 되지 못한
컨셉이 용기다.
가끔씩 용기 있는 결단을 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그래서 슬퍼진다.
내 DNA에는 ‘용기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의 성분만 있을 뿐
정작 ‘용기’는 별로 없는 듯하다.
올 겨울에도 누군가와 ‘이소라 콘서트’를 보러 가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소라의 컨셉은 ‘명성과 인기, 부귀’는 아닌 듯하다.
이소라 노래의 무겁고 습기 찬 슬픔은 ‘잠기다’라는 느낌을 준다.
가끔은 말하는 컨셉과 실제 컨셉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술이나 하자. 왜? 얼굴이나 보려는 거지.
막상 나가보면 자기 얘기 들어줄 사람, 특히 고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경우가 있었다.
술이나 하자. 왜? 고민 좀 들어줘. 라고 말해줬다면 고마웠을 것이다.
아마도 경험상 ‘고민 좀 들어줘’의 <고민남> 보다
‘니 얼굴 보고 싶어서’의 <우정남>이
훨씬 잘 먹히는 컨셉이었을 것이다.
얼굴이 보고싶은 것도 맞으니까… 라는 자기합리화는
고급승용차의 자동변속기처럼 부드러웠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몇 십 년간 ‘백의민족’과
‘한번도 먼저 침략한 적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과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나라’ 등을 컨셉으로 교육시켜 왔지만,
결국 오늘날 이 중 어느 하나도 와 닿거나
대한민국의 브랜드 자산이 된 게 없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컨셉은 ‘빨리빨리’와 ‘경쟁지옥’,
‘아줌마공화국’이다.
아! ‘냄비근성’과 ‘묻어가기’, 지긋지긋한 ‘간섭문화’와 ‘위계질서문화’등 도
서브 컨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갖고 싶은 컨셉을 쉽게 갖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내가 갖고 싶은 컨셉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이를 테면 ‘플레이보이’ 같은 컨셉은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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