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로스 맥도널드, 동서문화사, 2008(중판 2쇄)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인간이었던 무렵의 느낌을 다시 생각해 내려는 유령처럼 풀 주위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인간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죄를 보상하는 것만으로 생애를 허비한다.
“미스터 루, 당신은 용감한 남자입니까?”
“남자는 자기가 용감한지 아닌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펜글씨 연습장에 있는 격언을 많이 알고 있군요. 정직하게 대답해주세요.”
청년의 목소리는 말끝이 분명치 않았다. 이 새로운 까다로운 문제를 처리할 만한 힘을 찾아보려는 듯이 그는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눈빛이었다.
바깥의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안개는 이 집 유리벽을 향해 끊임없이 밀려오고, 나는 기묘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세계가 완전히 없어지고 브래드쇼와 나는 죽은 여자를 캡슐에 넣은 불가사의한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 완고함의 원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자기 정의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 또 하나는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을 수반한 두려움이었다.
사슴뿔 모자걸이 옆에 흐린 거울이 있었으며 그 속에 내 모습이 얼핏 비쳤다. 과거의 피비린내나는 순간을 찾아 헤매는, 마치 아득한 세계에서 온 망령 같았다. 내 뒤에 있는 여자도 비현실적인 존재이고 그녀의 큰 몸은 알맹이가 빠져나간 뒤의 칼집이나 껍데기처럼 보였다.
“… 난 시력이 약하기 때문에 안경이 없으면 당신과 하느님도 분간할 수 없어요.”
그녀의 시선이 카운터 뒤쪽 거울에 비쳐 보였다.
“놀라워요. 저것이 나예요. 마치 하느님이 버린 여자 같군요.”
“아처입니다.” 울퉁불퉁한 자갈 위에 내 짧은 그림자를 밀어내는듯한 느낌으로 나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건강하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요.”
“헬렌 해거티의 집 진입로를 달려서 쫓아갔어요. 기억합니까? 당신 발이 빨라서 따라잡지 못했지요. 이틀이나 걸려서 이제 겨우 따라잡았습니다.”
그는 ‘만물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파르메니데스는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으며 단순히 변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비밀을 누설하진 않아요. 모두 어둠에서 어둠 속으로 묻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을 알게 되는 겁니다.”
“젊은 분이 그런 좋은 집안에서 왜 도망쳐 나온 것일까요? 나 같은 사람은 한평생 걸려도 돈이 모이지 않아 고생하는데.”
“돈이라는 것에는 대체로 끈이 달려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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