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을유문화사, 2006(30주년 기념판 제1)

 

 

 

 

 

 

 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어떤 수준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인종인가, 종인가, 아니면 전체 생물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윤리의 혼란은 진화론적인 면에서 볼 때 어느 수준에서의 이타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생물학에서의 문제와 혼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유전자는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인 것이다.

 

 

 

 의식에 의해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가 무엇이든 의식이란 실행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 기계가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되는 진화 경향의 극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철저하게 거짓말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을 하는 편이 좋은 것은 왜 그럴까? 역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안정된 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미가 새끼를 편애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답은 어미가 이용할 수 있는 여러 자원을 새끼들에게 불균등하게 투자한다는 것이다.

 

 

 

 어떤 어미가 자식을 편애하는가에 관해서는 유전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이 문제의 해답이다. 그녀의 아이에 대한 유전적 근친도는 모든 아이들에 대해서 1/2로 같기 때문이다. 즉 어미의 가장 효율적인 전략은 자신의 번식 연령까지 양육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수의 아이들에 대해 ‘공평한’ 투자를 하는 것이다.

 

 

 

 일벌레들이 행하는 자살적 행위와 다른 형태의 이타주의 및 상호 협력은 그들이 불임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놀랄 일은 아니다.

 

 

 

 벌목의 전형적인 집에는 성숙한 여왕이 한 마리밖에 없다. 여왕은 젊어서 결혼 비행을 한 번하고, 그때에 저장한 정자로 나머지 전 생애- 10년 또는 그 이상- 동안 애 낳기를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암놈은 정자를 일정량씩 방출하여 수란관을 통과하는 알을 수정시킨다. 그러나 모든 알이 수정되는 것은 아니다. 미수정란이 발육하면 수놈으로 된다. 즉 수놈에게는 아비가 없다.

 

 우리들의 경우와 같이 두 세터의 염색체(한 조는 어미, 그리고 한 조는 아비로부터)가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한 조의 염색체(모두 어미 혈통)밖에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 속에는 미토콘드리아라고 불리는 작은 몸체가 들어 있다. 미토콘드리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화학공장이다. 만일 미토콘드리아를 잃으면 우리는 즉사하고 말 것이다.

 

 

 

 인간에 관한 특이성은 대개 ‘문화’라고 하는 하나의 말로 요약된다. 물론 나는 이 말을 통속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과학자가 쓸 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도 어떤 형태의 진화를 일으키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적 전달은 유전적 전달과 유사하다.

 

 

 

 “…… 밈은 비유로서가 아닌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구조로 간주해야 한다. 당신이 내 머리에 번식력이 있는 밈을 심어 놓는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당신이 내 뇌에 기생한다고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의 유전 기구에 기생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으로 나의 뇌는 그 밈의 번식용의 운반자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예컨대 ‘사후에 생명이 있다는 믿음’이라는 밈은 신경계의 하나의 구조로서 수백만 번 전 세계 사람들 속에 육체적으로 실현되어 있지 않은가.

 

 

 

 문화 환경 속에서 신의 관념이 안정성과 침투력을 주는 것은 도대체 그 관념이 갖는 어떤 성질 때문일까? 밈 풀 속에서 신의 밈이 나타내는 생존가는 그것이 갖는 강력한 심리적 매력의 결과이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의문에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준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 바로 고쳐진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영원한 신의 팔’이 구원해 준다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는 마치 의사가 처방하는 위약僞藥과 같아서 상상에 빠져드는 데 효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뇌가 세대에서 세대로 쉽게 신의 관념을 복사해 가는 이유의 일부이다.

 

 

 

 한 밈이 한 인간의 뇌의 집중력을 독점하고 있다면 경쟁자의 밈이 희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밈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광고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그리고 도서관의 서가 공간 등과 같은 상품을 대상으로 경쟁하고 있다.

 

 

 

 하나의 특별한 예를 들어 보자. 사람에게 종교 의식을 강요하기 위해 유효했던 교의의 하나는 지옥불이라는 협박이다. 많은 아이들 그리고 일부 어른들까지도 종교 율법을 따르지 않으면 사후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중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겪게 하는 매우 간악한 설득 기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술은 효과적이다. 아마도 그것은 심층 심리학적인 교화 기술의 훈련을 받은 성직자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기술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성직자들이 그렇게까지 머리가 좋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체는 의식을 갖지 않는 밈들이 성공하는 유전자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준 잔인성이라는 특성을 가진 덕분에 스스로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 더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밈과 유전자는 종종 서로 보강하지만 때로는 서로 대립하기도 한다. 예컨대 독신주의의 습관 같은 것은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성 곤충에서 볼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독신주의를 발현시키는 유전자는 풀 속에서 실패하게 돼 있다. 그러나 여전히 독신주의의 밈은 밈 풀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서 조립되었지만 밈 기계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리가 하는 일, 그것은 모든 변호사를 죽여 없애는 것이다.

-       <헨리 6> 2

 

 민사 분쟁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크나큰 협력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영합 게임에서의 대립으로 보이는 것을 약간의 선의에 의해 쌍방에게 이익을 주는 비영합 게임으로 바꿀 수가 있다. 이혼에 관해 생각해 보자. 좋은 결혼은 분명히 비영합 게임이고 상호 협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혼이 실패했을 때조차도 두 사람이 협력을 계속하여 이혼까지도 비영합 게임으로 처리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요소는 얼마든지 있다.

 마치 아이들의 행복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변호사에게 비용을 지불해 버리면 가족의 재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그래서 양식과 교양이 있는 부부는 둘이 같이 한 사람의 변호사에게 상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영국과 최근까지 미합중국 50개 주 전체에서는 법률이 또는 보다 엄밀히(그리고 의미 깊게) 말해 변호사 규약이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변호사는 의뢰인 부부 중 어느 편이든 한 사람밖에 수락할 수 없다. 상대편은 문전에서 거절당하며 법률적인 조언을 전혀 받을 수 없거나 다른 변호사에게로 갈 것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흥미로운 일이 시작된다. 두 사람의 변호사는 분리된 방에서, 그러나 같은 목소리로 즉시 우리들그들에 관해 상의하기 시작한다.

 

 불행한 부부는 영합 게임으로 이끌리고 만다.

 

 그들이 협력하는 하나의 방법은 쌍방이 상대측이 수락하지 않을 것이 뻔한 제안을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상대방이 수락하지 않을 것을 양측이 모두 뻔히 알고 있는 대안을 상대측으로부터 부추긴다. 그리고 일이 진행된다.

 

 우리가 곧 만나게 될 흡혈 박쥐같이 그들은 매우 잘 의식화된 규칙에 따라 경기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어떤 의식적인 감독이나 관리 없이 작동한다.

 

 

 

 남자는 여성의 육체 사진에 흥분하여 발기까지도 한다. 그는 결코 인쇄된 잉크의 패턴이 진짜 여성이라고 생각하도록 속고 있을리는 없다. 그는 자기가 종이 위의 잉크를 보고 있음에 불과한 것을 알고 있으나 그의 신경계는 진짜 여성에게 반응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반응하고 만다.

따라서 그 신경계가 특정한 종류의 자극을 참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리는 판단할 수 있다.

 

 그 어미새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속는다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그 양어머니의 신경계는 마치 그것이 무력한 마약 중독 환자인양, 마치 그 뻐꾸기 새끼가 양모의 뇌에 전극을 꽂는 과학자나 되는 듯한 상황 하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통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몸 속에 있는 모든 유전자는 우리가 그것을 몸 자신의유전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간에 기생적유전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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